
간결한 선이 빚어낸 가장 다정한 옆모습, 하얀 도화지 위에 담긴 단단한 위로, 때론 불쑥 웃음을 터뜨리게 하던 찰리 브라운과 친구들의 대사들. 어린 시절엔 귀엽고 재밌기만 했던 이야기들이, 어른이 된 지금은 조금 다른 온도로 마음에 스며든다.
제주도 동쪽, 구좌읍에 위치한 ‘스누피가든’은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약 2만 5천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가든하우스(실내 전시장)와 야외가든, 카페, 스토어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미국 만화가 찰스 M. 슐츠의 연재만화 『피너츠(Peanuts)』를 테마로 조성된 이곳은, 단순한 만화 전시가 아닌 ‘쉼’과 ‘공감’의 의미를 체험으로 풀어낸 자연형 전시장이다. “일단 오늘 오후는 쉬자”는 스누피의 대사에서 출발한 이 공간은 바쁜 일상 속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는 말을 건넨다.

스누피와 친구들이 말을 거는 공간
전시는 실내 가든 하우스에서 시작된다. 입구를 지나면 테마에 따라 구성된 다섯 개의 전시 공간이 순서대로 펼쳐진다. 관계, 일상, 사색과 휴식, 행복, 상상. 『피너츠』 속 이야기와 자연의 메시지를 함께 엮은 이 공간을 지나며 관람객은 각자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릴 적엔 그저 가볍기만 했던 만화 속 캐릭터들의 짧은 대사들이,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너답게 살아! 아무도 네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어.(Be yourself. No one can say you're doing it wrong.)’, ‘인생이라는 책에는 결코 뒤에 정답이 나와 있지 않아.(In the book of life, the answers aren't in the back.)’ 등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용기가 조용히 담겨 있었을 줄이야….
스누피를 단지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로만 알던 아이 역시 점차 만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네 컷 만화를 찬찬히 읽어 보며, “라이너스에겐 애착 담요가 진짜 중요하구나?”, “우드스탁은 병아리일까, 앵무새일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모습은, 어느새 이야기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 이 전시는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소’가 아닌, 세대간 감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경험의 장이 되었다.
작은 도장을 따라가는 커다란 모험
가든 하우스를 지나면 피너츠 친구들이 자연 속에 녹아든 야외 정원이 이어진다. 여기서부터가 스누피가든의 진짜 하이라이트다. 숲속을 스치는 바람,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 발 아래 바스락거리는 낙엽 하나까지도 피너츠 에피소드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화가 현실이 된 공간인지, 현실이 만화를 닮아가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상상과 현실이 아름답게 포개진다.
야외 정원에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요소가 숨어 있는데, 바로 ‘스탬프 투어’다. 피너츠 야외 공간 곳곳에 숨겨진 여덟 개의 테마 스탬프를 모두 모으면, 작은 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먼저 찾을 거야!”라며 앞장서는 아이의 표정은 보물을 찾기 시작한 탐험가처럼 생기 넘쳤다. 꽤 넓은 정원이지만, 스탬프 투어와 함께하니 지루하거나 힘들 틈이 없었다. 조형물 사이를 뛰어다니고, 연못 나룻터에서 잠깐 숨을 고르며 스탬프를 꾹 찍는 그 순간들이 아이에게는 하나의 모험이, 우리 가족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될 하루가 되었다.
“오늘 오후는 쉬자”는 위로
아이가 문득 스누피의 조형물 앞에서 멈춰섰다. “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상상은 언제나 아이의 몫이니까. 자연은 그 자체로 열린 책장이 되어, 아이의 상상과 나의 추억을 나란히 세웠다.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이 전해졌고, 오랜 친구와 대화를 나눈 듯 편안한 여유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오후, 우리는 스누피처럼 잠시 쉬며 천천히 걷는 법을 배웠다.

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세계 여행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