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오재철


아더왕의 이야기에 밤새 흥분하며 뜬눈으로 지샌 적이 있는가? 깊고 진한 위스키의 향이 머무는 곳의 모습이 궁금한가? 끝도 없이 이어진 목초지 속 내면의 깊은 자신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이 꿈꾸는 여행지는 바로 스코틀랜드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천성이 게으른 탓에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다시 내려와야 할 꼭대기를 향해 숨 가쁘게 올라야 하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괜히 낙오자가 된 것 같은 느낌도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가능하다면, 하이킹은 피하고 싶은 여행 종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에서의 하이킹은 힘들지만 해야만 하는, 여행자에겐 흡사 필수 과목 같은 것이었다. 그곳의 대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하이킹만 한 게 없다는 의견에 일언반구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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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지난 즈음 글렌코(Glencoe)에 다다랐다. 거대한 산과 깎아지른 절벽들이 즐비한 이곳을 뒤덮고 있는 것은 넓디 넓게 자리잡은 풀과 바위 뿐. 어딘가에서 가져와 심어 놓은 것처럼 홀로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 중심에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감히 이곳을 오르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비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유명한 쓰리 시스터즈. 각각의 봉우리가 해발 1,000미터나 된다.


“그래, 해보자! 앞만 보고 걷다 보면 언젠가 다다르겠지!” 해가 넘어가기 전에 오르려니 마음이 급해졌다. 트레킹화의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르고 또 올라 초원 지대로 들어서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당최 시간이 흐르고 있긴 한 건지 분간이 안 되었다. 워낙 망망한 풍경 탓에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인 것만 같았다. 산 입구에서 봤던 풍경들도 함께 걸어온 건지 주변의 풍경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차차! 앞만 보고 무작정 덤벼든 하이킹, 저 꼭대기를 오늘 반드시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무거운 욕심에서 시작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장기 여행을 포함하여 수차례의 여행을 하며 배운 것 중 하나가 포기할 건 깨끗이 포기하자 아니었던가? 습관적인 욕심이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나 보다 싶었다. ‘내려놓자. 가능한 곳까지만 가 보자!’라고 생각을 바꾸니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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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옆으로 뒤로 돌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루터기에 자리 잡은 촉촉한 풀잎들도, 그 위를 맴도는 작은 생명체들도 모두 대지를 함께 걷는 친구가 되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걸터앉은 바위 하나도 단순히 시간을 허비하고 돌아서는 공간이 아닌, 내 체취가 남은 추억의 쉼터가 되었다. 아까부터 흩뿌리던 궂은 날씨 속 가랑비도 산행을 방해하는 훼방꾼이라기 보다는 자연의 다채로움을 알려주는 조물주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오늘의 목표 지점은 우리의 발길이 멈추는 곳 ···.


어쩌면 우리는 너무 앞만 보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정해져 있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길이 외롭고 고달픈데도 숙명인 양 그 길만을 고집한다. 빨리 간다고 해서, 멀리까지 간다고 해서 많은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아닐 텐데, 뒤처질세라 앞을 향해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 보면 어떨까? 내일을 바라보기보다 오늘을 둘러보면 우리 삶이 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스코틀랜드, 글렌코

우리가 흔히 ‘영국’이라 부르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연합’이라는 국명에서 알 수 있듯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가 속한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의 북동 지역인 북아일랜드가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다. 본문 속 글렌 코 지역은 스코틀랜드의 서부 하이랜드 주에 위치해 있으며, 영화 ‘007 스카이폴’의 촬영지로 유명한 거대한 협곡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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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으며,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아내와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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