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우리는 45일간 캠핑카를 타고 북유럽의 여름을 달렸다. 독일에서 시작해 덴마크와 스웨덴을 지나 노르웨이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를 정해두진 않았다. 다만, 자연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북유럽의 도로 위에 올랐다. 독일에서 빌린 캠핑카는 매일 우리의 집이 되었고, 달리는 길은 우리의 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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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조용한 호숫가나 도로변에 차를 멈췄다. 그곳이 곧 오늘의 우리집이 되었다. 주소도 없고, 담장도 없는 집. 대신 창문을 열면 피오르의 바람이 들어오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가득 들어왔다. 어느 날엔 호숫가에  앉아 밥을 먹고, 또 다른 날엔 산중턱에서 해가 지는 걸 바라보며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그렇게, 풍경과 기분에 따라 매일 다른 집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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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동굴에서 곰을 만났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여기서 하루 묵을까?”였으며, 가장 많이 한 행동은 멋진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차를 세우고 멍하니 자연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매일이 즉흥이었고, 그 즉흥 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웠다.


하르당에르(Hardanger)의 어느 산길을 지나다 남편이 말했다. “여기서 아침 먹을까?” 도로 한쪽에 작은 공터가 눈에 들어왔고, 차를 세우자 공터 옆으로 좁고 긴 데크길이 눈에 보였다. “잠깐 걸어볼까?” 우리는 앞뒤로 서서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랍게도 낮은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어른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낮은 통로였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쉽게 들여보내고 싶지 않은’ 비밀을 숨겨둔 듯한 느낌이었다. 몸을 낮추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자,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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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의 곰이 쓰레기 더미 위에 잠들어 있었다. 그 곰은 인형도, 조각상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정교한 털결, 느릿한 숨결 같은 형상은 생명 그 자체였고, 곰이 누운 자리는 이상할 정도로 무언가가 쌓여 있었다. 가장 아래에는 녹슨 도구들과 도자기 조각 같은 옛 유물들이, 그 위에는 플라스틱 병, 전자제품, 소비재 같은 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한 몸처럼 얽혀 있었고, 그 위에 조용히 곰이 누워 있었다. “엄마, 곰이 슬퍼 보여…”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곳은 전시장 같아 보이지 않았다. 작품을 알리는 설명도, 제목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데크길 시작점에 작은 안내 팻말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너무나 분명했다. 환경은 단시간에 무너진 게 아니다. 시간을 타고 축적된 무수한 선택의 결과. 곰은 말없이 그 모든 걸 안고 있었다.


이 작품의 이름은 덴(Den), 미국의 환경예술과 마크 디온(Mark Dion)의 설치 미술이다. 천장의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자연광만으로 연출된 그 공간은 인공 조명이 없었기에 더 진실하게 다가왔다. 곰의 얼굴을 비추는 빛, 주위를 감싸는 침묵, 그리고 쓰레기 위에 잠든 생명. 우리는 ‘덴’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우리는 단지 아침을 먹으려다 뜻밖의 동굴을 만났고, 몸을 낮추고 들어간 그 좁은 공간에서 준비 없이 쓰레기 더미 위 잠을 자는 곰을 맞딱뜨렸다. 일부러 가르치려 들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는 배움이었다. 환경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도, 경고도 없었지만, 아이도, 우리 어른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의미를 받아들였다.


노르웨이의 방식은 말이 없었다. 자연을 지키고, 예술로 풀어내며, 삶의 일부로 살아갈 뿐이었다. 화려한 조명이나 해설 없이 조용히 생각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다시 길 위에서


쓰레기 더미 위 곰의 눈빛을 마음에 담은 채 우리는 다시 도로에 올라섰다. 노르웨이의 로드트립은 그런 여정이었다. 계획은 없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여행. 캠핑카 바퀴가 이끄는 풍경을 따라 잠시 멈추면, 그 멈춘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마주했다.


노르웨이의 여름은 길었고, 노을은 더디 졌으며, 조용한 바람이 늘 함께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던 일상의 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었고, 아이와 나, 그리고 남편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과 다시 연결되었다. 


여정은 끝이 났지만, 그 시간이 남긴 감정과 감각은 오래도록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어떤 장소는 특별한 이유 없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조용히, 말없이, 마음 한구석에 머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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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세계 여행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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