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짙게 내려앉을 때면 마을 전체가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황홀한 아티틀란 호수와 만난 지도 어느새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름다운 호수의 풍광에 한눈에 반해버린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산 페드로에서 한 달여를 머물기로 했다. 이 글은 한 달 동안 변함없이 반복됐던, 여행이 아니라 마치 일상과도 같았던 우리들의 하루 이야기다.

   러시아의 바이칼, 페루의 티티카카와 함께 깊고 너른 세계 3대 호수 중 하나인 아티틀란. 그 유명한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페드로의 페넬레우 호스텔에서 맞이하는 새벽 공기는 언제나 상쾌하다. 호수 전체를 뒤덮었던 새벽 물안개가 유유히 사라지고, 맑고 청량한 아침이 시작될 때면 우리도 말간 얼굴로 등교 준비 끝! 여행 중 웬 등교냐고? 멕시코를 여행하며 ‘만국의 공통어’라는 영어가 잘 안 통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중남미 여행에 대비해 이곳 산 페드로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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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남짓. 울창한 숲 속 호숫가에 자리한 ‘산 페드로 스페인어 학교’에는 우리네 원두막 같은 방갈로가 여러 채 놓여있다. 각각의 방갈로가 선생님과 학생이 일대일로 공부하는 하나의 교실인 셈이다. 먼저 도착한 학생이 교실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갖기 마련. 나는 늘 호숫가 바로 옆 방갈로를 사수하기 위해 일찍 도착하곤 했다. 수업을 듣다가 잠시 고개를 돌리면 호수 위 평온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손낚시를 하는 작은 배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물 위를 수놓는 물오리들, 바람 한 점 없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함이 감도는 이 시간에는 물결 소리, 그리고 선생님과 나의 스페인어 소리만이 나직이 찰랑거린다.

   일대일 수업이었기에 우리 부부는 각자 선생님이 달랐다. “오늘 뭐 배웠어?”, “나 오늘 이거 배웠지롱!”, “그럼 넌 이거 알아?” 오전 수업이 끝나고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경쟁 모드로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서로 배운 걸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 학교에서 배운 걸 잘난 척 해대는 어린아이 같다. 오후엔 주로 학교 친구들과 이웃 마을로 놀러나가곤 했다. 퀘백에서 온 60대 노부부, 스웨덴에서 온 50대 귀여운 학구파 아주머니, 멀리 대만에서 봉사하러 온 애쉬, 혼자 세계여행 중이라는 용감한 그녀, 한국인 민지까지, 모두 우리들의 친구였다. 호수 맞은편에 있는 산 마르코스로 가는 카약을 저으며…

   ‘산 마르코스’라는 앞마을에 가기로 한 날. 산 마르코스는 호숫가 반대편에 있으니 오늘의 교통수단은 카약(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비루한 배)이다. 선착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색상의 카약을 골라 호수 위로 나아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저 천천히 호수 위를 떠 있다가 하늘 한 모금, 바람 한 점에 목을 축이며 노 한 번 젓고,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면서 또 한 번 노를 저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호수 위를 떠다니다 보니 저 멀리에 보이던 마을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다.

   선착장 근처의 카페에 들러 커피도 한 잔 하고, 마을 사람들과 눈인 사도 건네며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담벼락의 낙서도 감상하고, 동네 개와 대화도 나누며 어영부영 보내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대화는 이렇다.“집에 돌아가면 낮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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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집이 어딨냐?”

   “하늘 아래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시원하게 씻을 수 있는, 배부르게 밥 해 먹을 수 있는 호스텔이 바로 우리 집이지!”

   “하긴 침대 하나 덜렁 놓여있는 낡고 허름한 우리 호스텔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니 집 맞네, 집.”

   여행을 떠나기 전엔 자주 사용하지 않아 생소했던 단어 ‘행복.’ 하지만 낯선 이곳에선 도처에 행복이 깔려 있다. 하늘 아래 우리 방 한 칸. 그 안에 침대가 푹신하니 행복하다. 따뜻한 물이 잘 나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작은 배를 타고 기꺼이 건널 수 있는 자연이 있으니 행복하다. 친구들이 있는 학교에 갈 수 있으니 행복하다. 이 모든 걸 함께 나눌 수 있는 내 곁의 사람이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다.

   호수 위로 떠오른 보름달이 밝기도 하다. 산 페드로의 별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어제처럼 지난주처럼 즐거웠던 하루여, 안녕. 변함없는 모습으로 내일 만날 하루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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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세계 여행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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