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차박 열풍이 분 지는 꽤 됐다. 요즘 같이 차박하기 좋은 계절이 되면 가장 먼저 차박을 했던 우리의 그때가 떠오르곤 한다. 때는 바야흐로 10년 전, 세계 여행을 하는 동안 렌터카를 이용할 때마다 우린 자동차에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한낱 스쳐가는 빌린 차에 불과했던 녀석(들)은 평생 잊지 못할 동료로 거듭났다. 첫 번째 녀석의 이름은 ‘까슈’였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냥, 프랑스에서 빌린 차라서. 어쩐지 개구쟁이 프랑스 소년의 이름 같지 않은가? 프랑스를 시작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지나 80여 일간의 즐거웠던 까슈와의 여행은 스위스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비행기를 타고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도착하여 두 번째 친구인 ‘스캇’을 만났다. 스코틀랜드의 앞 스펠링 4개를 따서 스캇이다. 영국의 멋쟁이 신사 이름 같아서 난 스캇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스캇은 소형에서 중형 사이의 승용차였다. 까슈(첫 번째 렌터카)에서 그래왔듯 우린 차를 받자마자 어떻게 하면 최대한 편한 잠자리를 만들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했다. ‘숙박비를 좀 아껴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게 사실이다. 외국의 일부 자동차들은 뒷좌석을 앞으로 구부리면 납작한 방석처럼 완전히 접히기 때문에 트렁크와 뒷좌석이 한 공간으로 연결된다. 평평하지 않은 곳에 옷들을 포개고 그 위에 이불을 깐 다음 침낭을 덮으면 잠자리가 만들어진다.


내가 먼저 트렁크 아래쪽으로 기어 들어가 운전석을 향해 다리를 쭉 뻗고, 남편도 낮게 포복하여 겨우 자리를 마련하고 몸을 뉘운다. 우리는 겨우 몸을 달싹달싹 움직일 만큼의 공간에서 그렇게 잠을 잤다. 스코틀랜드 여행 13일 중 9일 밤을 스캇과 함께 보냈다.


alt

         

에든버러를 벗어나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리며 작은 마을 몇 개를 지나자 풀색 대지와 회색빛 하늘만이 펼쳐진 야생의 하이랜드가 나타났다. 가장 스코틀랜드다운 풍경,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을 태초의 과거로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길 위에는 남편과 나, 그리고 스캇만이 있었다. 어떤 날은 스캇의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데도 주유소가 안 나와 전전긍긍 해야할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하루종일 지나가는 차 한 대 못 만날 때도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기 힘든 드넓은 평원 위 그림 같은 양떼들이 아름다웠고, 광야의 말과 소가 마냥 반가웠다.


해가 저물면 도로변 적당한 곳에 스캇을 주차시키고, 라면 하나 호로록 끓여 먹고선 눈을 붙였다. 잠결에 들리는 바람 소리, 동물의 울음 소리, 가끔은 빗소리······.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우리를 지켜줄 녀석은 스캇 밖에 없었다. 두려운 밤을 버티면 어김없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몽환의 새벽이 찾아온다. 스코틀랜드의 낮과 밤을 우리처럼 온몸으로 느껴본 자가 얼마나 될까?


alt

         

처음엔 숙박비를 아껴보고자 시도했던 차숙ㅡ당시엔 차박이라는 단어가 없어 우리끼리 차숙이라 불렀다.ㅡ이었지만 우리는 점차 하이랜드가 내뿜는 길 위의 매력에 중독되었다. 가을 초였지만 밤에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자야만 추위로부터 살아 남을 수 있는 정도의 기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여행의 절반 이상을 차에서 자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늪 같은 자연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서 보았던 싱그러운 녹색도 아니었고,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보았던 맑고 푸른 하늘도 아니었지만 채도 낮은 녹색과 회색빛 하늘 속에는 꾸며지지 않은 솔직한 자연이 있었다. 극한의 고독과 쓸쓸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곳, 펑펑 울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곳, 척하지 않고 완전히 내 안의 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어쩌면 그건 세상 끝으로 혼자 달려가는 기분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내게는 말없이 손잡아 주는 남편과 스캇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엔드리스(Endless) 드라이브, 하루하루 숙소를 찾아 해메기 보단 발길 멈추는 곳에 그대로 잠시 머물 줄 아는 낭만을 알게해 준 여행. 이게 모두 네 덕분이다. 고맙다. 스캇!

        

alt



alt


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6살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하던 중 팬데믹으로 인해 취소. 현재 캠핑카로 전국을 돌고 있다. 

여행스케치' 다른 기사 보기
prev
next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