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수는 왜 이름이 69호수예요?”


“와라즈에는 참 많은 호수가 있어요. 모든 호수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서 번호로 부른 거죠. 69번째 호수라는 뜻입니다.”
참 멋 없는 이름이다. 아무런 뜻도 없이 69번째 호수라니! 과테말라에서 만났던 한 여행자의 강력한 추천이 아니었다면 돌아섰을지도 모를, 원래 가려고 했던 루트에서 많이 벗어난 곳이었다면 과감히 패스했을지도 모를 딱 그 정도의 기대감이었다. 게다가 끝없는 트레킹이 끝난 후에나 만날 수 있는 호수라니.


가이드가 있는 투어와 운전 기사만 있는 투어, 우리는 가격이 싼, 운전 기사만 있는 투어를 선택했다. 트레킹에 나설 일행을 태운 미니 밴은 마을을 벗어나고 벌써 두 시간째 달리고 있다. 끝없이 산으로 들어가는 버스.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경을 보여주려는 듯 버스는 달리고 또 달린다.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호수와 한눈에 담을 수 없는 수직 절벽도 무심히 지나쳤다. ‘이런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들어갈 만큼 괜찮은 거야? 69호수라는 곳이?’ 존재하지 않았던 기대감이 슬며시 마음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상기된 표정을 엿본 기사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찬 미소가 떠올랐다. 달뜬 얼굴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빠의 여유로움이라고나 할까? 버스가 크게 한 번 쿨럭이더니 이내 엔진을 멈춘다. 69호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행에게 운전 기사가 오늘의 이벤트를 선포했다.


“자, 여기까지가 차로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제부터 3시간 동안 걸어 올라가시면 69호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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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차지한 초원지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길옆으로 조용한 개울물이 흐른다. 고행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평온한 풍경에 마음이 놓였다. 천천히 가자. 이런 정도의 길이라면 굳이 서둘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산행을 신청한 사람은 차 안에서 작은 담소를 나누었던 두 명의 영국 처녀들, 그리고는 우리 부부가 다다. 개울 길을 따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한껏 여유를 부린 탓일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다른 일행들이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개울을 따라 올라가라고 했던 운전기사 말과는 다르게 어째 길이 점점 험해진다.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게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러다 가파른 절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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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이 길, 정상 루트가 아니구나! 산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되돌아가자니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자니 험난한 등반이 될 것 같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만 넘어서면 다시 평탄한 길이 나올 거야.”

 

웃으면서 다독거려보지만, 솔직히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돌아서는 건 곧 69호수를 포기한다는 말. 일단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영국 처자 둘과 우리 일행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가까스로 절벽을 기어올랐다. 그제야 정상적인 등산로가 보였다. 잠시 쉬어갈 겸 절벽 위 작은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배낭에 꽂힌 물통을 쥐어들었는데, 이걸 그만 실수로 떨어뜨렸다. 근데 왜 소리가 안 들리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바위에 부딪히는 물통. 아래를 보니 길이 아닌 곳으로 꽤나 높이 올라온 모양이다. 문제는 고산 지대에다가 예정에도 없던 암벽 등반 때문에 일찌감치 바닥을 보이는 체력. 69호수는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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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수를 추천했던 그 여행자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멋있어. 남미에서 으뜸가는 풍광 중에 하나야. 하지만 트레킹을 하는 동안에는 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흐흐흐~!”


멋있다는 말에 홀려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 영국 처자들이 코카잎을 건넸다. 고산병 때문에 지친 거라고, 이거라도 씹으면 힘이 좀 날 거라고. 코카잎 때문인지 친구들의 우정 덕분인지 다시금 걸을 힘이 났다. 서로를 다독이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다채로움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엄청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사정없이 가파른 경사는 지친 여행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한걸음을 내딛고, 한숨을 몰아쉬기를 수차례. ‘69호수고 뭐고 다 포기하고 내려갈까?’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기를 수십 차례. 남은 한 방울의 힘마저 쥐어짜려고 이를 악물어도 입만 아플 뿐 발걸음은 옮겨지지 않는다. 극심한 피로감으로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가고, 텅텅 비어있는 작은 배낭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른다. 진심으로 죽을 것 같다.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다. 작은 숨조차 내쉬기 버거워 침이 턱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 고일 때쯤 급기야 나는 네 발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기억에 없는 한참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연한 민트 빛 호수, 69호수가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고, 내 눈가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속 깊숙한 곳에 숨겨진 호수의 비현실적인 절경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죽기 직전까지 나를 몰아세웠던 산행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뒤섞인 형언할 수 없는 감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소리까지 내면서 엉엉 울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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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6살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하던 중 팬데믹으로 인해 취소. 현재 캠핑카로 전국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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