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찰텐으로 향하는 길은 흡사 지구를 떠나는 것 같았다. 인간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함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더니 굽이를 도는 순간 옥빛 호수가 펼쳐진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땅이었다가 어느 순간 거대한 설산이 툭 하고 튀어나온다. 하늘은 또 어떤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 사이로 해가 지고 달이 뜬다, 달이 지고 해가 뜬다. 한 치 앞을 종잡을 수 없는 풍경 속에서 버스는 달린다.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바릴로체에서부터 쉬지 않고 30시간을 달리면 엘 찰텐이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힘들게 이곳을 찾은 이유, 트레킹 때문이다. 남미 여행 중 딱 한 군데에서만 트레킹을 할 수 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엘 찰텐에서의 트레킹을 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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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칠레와 아르헨티나 양국에 걸쳐 있는 파타고니아는 한반도 면적의 5배 크기다. 3,000m가 넘는 설산과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푸른 빙하와 붉은 사막, 다양한 동식물과 기이한 화석까지 만나볼 수 있는 이곳엔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이 신기롭고도 거대한 자연은 엘 찰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는데, 이곳은 파타고니아 트레킹의 시작이자 끝, 트레킹 마니아들의 집결지로 유명하다. 엘 찰텐 주변의 트레킹 코스는 매우 다양한데, 대표적으로 피츠 로이 봉(3,405m)을 바라보며 걷는 코스와 세로 토레 봉(3,128m)을 마주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이를 1박 2일, 3박 4일 혹은 일주일 등 원하는 날 수 만큼 캠핑을 즐기며 다녀올 수도 있지만 각각 당일 트레킹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기에 우리는 당일 코스를 선택했다.


먼저 한 시간 남짓 완만한 코스가 이어졌다. 연두빛 잔디에 푸른 잎사귀 가득한 숲. 아담한 키의 나무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딱 탐스러운 양의 어린 나뭇잎들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가지 사이로 충분히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걷는다. 하늘도 바라보고 땅도 쳐다보며 걷는다. 그러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갈래갈래 심하게 휘어지고 갈라진 나무 앞에 멈춰 섰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즉에 메말라 죽었어야 할 그 나무조차 씩씩하게 숨을 쉬고 있다. 이 숲엔 상처를 치료해주는 생명의 요정이라도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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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생명의 숲을 지나자 몸에서 슬슬 열이 나고, 자연스레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허리춤에 동여맸다. 그 사이 연둣빛 잎사귀는 농익은 진녹색으로 바뀌었고, 울창한 숲 대신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마치 책장을 한 장 빠르게 넘기듯, 손바닥을 뒤집듯 한순간에 말이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푸른 습지를 지났다.


풍경은 다시 한순간에 울퉁불퉁한 돌밭으로 바뀐다. 책장을 넘기듯 순식간에 바뀌는 풍경에 지루할 틈이 없다. 어느 순간 바뀐 붉은 단풍나무 숲. 트레킹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건만 하나도 힘이 들지 않다. 이쯤 되면 119 좀 불러 달라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가 훨씬 지났건만···. 사실은 아까부터 꿈결처럼 빛나는 저 하얀 피츠로이를 향해 걷고 있던 중이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웅장한 피츠로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아름답고도 거대한 돌산에 가까워질수록 둘은 콩당콩닥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개구쟁이 소년과 소녀처럼 모험의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던 피츠로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깎아지른 듯한 경사의 자갈 언덕이 이들을 막아섰다. 이번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구간, 이 역경을 이겨내야 그들의 모험도 무사히 끝남을 알고 있지만, 점점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던 카메라를 잠시 내려두고 소녀의 손을 잡아끄는 그, 둘은 함께 힘을 합해 자꾸만 미끄러지는 다리를 끌어올리고 올려 기어코 자갈 언덕의 꼭대기에 우뚝 올라섰다. 그곳에서 마주한 건 숨이 멎을 듯 영롱한 빙하 호수 속 만년설로 뒤덮인 피츠로이. 그것은 아주 대단한 모험기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구간이 다소 힘들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노고는 말끔히 사라진다. 영롱한 트레스 빙하 호수 속에 담긴 새하얀 피츠 로이가 거기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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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속 여행지 ’아르헨티나, 엘 찰텐’

엘 찰텐은 아르헨티나의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Los Glaciares National Park)에 속해 있다. 1937년에 국립공원으로, 1981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 유산으로 지정됐다. 로스 글레시아레스 국립공원은 크게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는데 남쪽 입구에는 크고 작은 몇 백 개의 빙하가 군집된 엘 칼라파테가, 북쪽 입구에는 세계 5대 미봉의 하나인 피츠 로이 봉우리로 향하는 엘 찰텐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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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을 출간했으며,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히 활동
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다.
유튜브에서 ‘란아 세계여행 가자’를 검색하면 이들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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