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통과의례처럼 부산으로 가는 밤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에서 밤을 지새운 후 부산 앞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 20대의 시작을 낭만의 아침으로 시작하는 것. 20대를 눈앞에 둔 어린 고교생에게 이만한 유혹이 또 있을까?


나 또한 그런 꿈을 안고 밤 기차에 올랐지만 현실에 낭만이란 건 없었다. 내 몸 하나 끼워 넣기 힘들 정도로 좁은 좌석, 그 공간마저도 옆자리 아저씨에게 반 이상 점령 당하기 일쑤였고, 담배에 찌든 아저씨 냄새와 쉼 없는 코골이를 겨우 이겨낼 만하면 들려오던 갓난 아기의 울음 섞인 칭얼거림에 그나마 억지로 청하던 잠마저 이내 달아나버렸다. 몽롱해져 가는 의식과는 반대로 너무나도 선명하게 열차 안을 메운 형광등 조명은 또 얼마나 얄미울 정도로 밝았던지... 자다깨다를 무한 반복하던 그 순간, 열차 안의 모든 불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정전입니다. 금방 다시 켜집니다.”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돌아다니던 역무원의 다급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전이 만들어낸 정적 속에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밤하늘의 빛들이 하나 둘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라히 빛나는 달빛이 먼저 열차 안을 돌아다니며 밤 기차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의 꿈과 낭만을 깨우기 시작하자 이내 밤하늘을 밝히던 별빛이 한 가득 쏟아져 내려온다.


“정전이 끝났습니다.” 꺼져 있던 형광등에 눈부시게 밝은 불들이 일제히 들어왔다. 열차 안을 가득 메우던 달빛과 별빛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잠깐이었지만 너무도 달콤했던 그때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갈 무렵, 캐나다의 비아레일Via Rail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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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를 여행하는 방법 중 가장 낭만적인 걸 꼽으라면 두말 않고 기차 여행이라 대답하겠다. 태평양의 도시 밴쿠버에서 대서양의 도시 할리팩스Halifax까지, 그야말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는 어마어마한 라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바로 밴쿠버에서 위니펙Winnipeg까지의 구간. 2박 3일간 로키 산맥을 곳곳이 훑으며 지나가는 이 구간은 누구나 탐할 만큼 매혹적이다. 그런데 한겨울 로키 산맥으로 떠나는 기차 여행? 온 세상이 흰 눈으로 하얗게 덮이는 겨울 여행이 한없이 아름다울 것 같지만 추위에 떨면서까지 시도해보기엔 글쎄,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하지만 기차 안 에서 따스한 핫초코를 손에 들고 눈 덮인 로키 산맥을 바라볼 수 있는 겨울 여행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그런 설렘을 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큰 몸집을 덜컹이며 밤새 움직이던 기차는 고요한 겨울 호숫가 곁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삼삼오오 식당 칸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아침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는다. 커다란 창문 옆에 놓인 테이블에 둘러앉자 저 멀리 여명이 밝아온다. 파란 겨울 그림이 창가에 새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들이킨다. 아침을 맞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순간이다. 동요 없는 호수처럼 조용히 아침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자 이내 기차도 무거운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산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차창 밖은 호숫가에서 나무 숲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나른한 오후,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파노라마 칸으로 이동했다. 열차의 2층, 그러니까 계단으로 연결된 일종의 관람석 같은 모양새의 파노라마 칸은 지붕과 벽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다. 덕분에 승객들은 일반 열차라면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드넓은 풍경을 온전히 만끽할 수가 있다. 창 밖에 매달린 다양한 풍경을 안주 삼아 아내는 맥주 한 캔을 들이킨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삼나무 가지들이 차창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숲길을 지나자 밤 사이 내린 서리로 뒤덮인 들판이 두 팔을 벌려 기차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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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길동무가 되어준 강물 위로 피어 오르는 물안개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자 조용히 잠자고 있던 오리 떼들이 ‘푸드득’ 날아오른다. 옆자리에서 말없이 차창 밖을 보시던 장모님이 말씀하신다. “이 멋진 풍광들을 이렇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다니… 꿈속을 달리는 기차 같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움을 꿈꾸듯이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기분 좋게 흔들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책을 펼쳐 들었다. 마침 책 속의 아이도 깊은 산속을 여행 중이다. 아이와 함께 신비로운 숲 속을 거닐다 잠시 고개를 들자 글 속에 숨어 있던 그림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꿈결처럼 감미롭던 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노을로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까만 어둠으로 가득하다. 밤이 되었지만, 파노라마 칸의 불은 켜질 줄을 모른다. 정전인가? 의구심 가득한 내 눈길을 읽었는지 승무원이 말을 건넨다.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을 볼 수 있게 실내 등을 최대한 줄였어요.” 그 세심한 배려 덕분에 머리 위로 떠 있는 수천 아니 수만 개의 별들이 함께 달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밤 기차에서 잠시간 누렸던 정적의 아름다움이 끝없이 이어지는 순간이다. 은하철도 999가 검은 은하수를 유영하듯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반짝이는 별들을 이정표 삼아 달리는 기차. 꿈이 현실이 되어버린 마법의 기차 여행 속에서 오직 하나의 안타까움은 이 길의 끝엔 종착역이 있다는 것.

        


본문 속 기차 여행 ‘비아 레일’ 소개

비아 레일, 여객과 화물 운송을 담당하던 캐나다의 기차가 1976년 캐나다 내셔널 철도의 여객과 화물부분이 분리되면서 현재는 여객 운송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속도를 중시하는 기차가 아니기 때문에 완행에 가까운 속도로 서쪽끝 벤쿠버로부터 동쪽끝 할리팩스까지 무려 13,000km를 운행한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30번을 왕복하는 어마어마한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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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을 출간했으며,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다.

유튜브에서 ‘란아 세계여행 가자’를 검색하면 이들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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