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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카 여행을 하며 미국 유타 주에 있는 카납Kanab이라는 마을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하루 여정을 마치고 퇴근하듯 이 캠핑장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코딱지만 한 마을에 나흘씩이나 머물고 있는 이유는 ‘더 웨이브The Wave’라는 관광지 때문이다. 옷깃만 스쳐도 쉽게 떨어져 나가는 사암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루에 딱 20명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곳. 10명은 인터넷을 통해 사전 신청을 받고, 나머지 10명은 매일 아침 9시에 마을의 인포메이션 센터에 직접 방문한 사람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해 결정된다. 인터넷 신청은 수 개월 전에 미리 해야 하고, 현장 제비뽑기는 매일 아침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백 명까지 모인 사람들 중에 딱 10명만 당첨의 행운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루 20명의 규칙이 얼마만큼 엄격한가 하면, 제비뽑기로 뽑는 10명 중 8명이 뽑힌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뽑힌 그룹의 인원 수가 3명이라면 그중 2명 만이라도 갈 것인지 그룹원 모두가 포기할 것인지 정해야 할 정도이다. 그런 만큼 웨이브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온갖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말씀!


다행히 카납 주변으로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 앤텔롭 캐년 등 유명한 관광지들이 몇 있어 우리는 카납을 기점으로 주변 지역을 돌아보면서, 매일 아침 9시면 인포메이션 센터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네 번째 도전의 날 아침, 맥없이 캠핑카 문을 밀어젖혔다. 오늘도 떨어진다면 깨끗이 웨이브를 포기할 작정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 우리 캠핑카 옆에 나란히 주차된 빨간 승용차 한 대. 차창 안쪽엔 구겨진 배낭과 버너, 먹다 남은 빵 봉지와 찢어진 신문지,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가지와 진흙 묻은 등산화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무질서한 물건들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꿈틀대더니 이내 자동차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깜짝이야! 누에고치에서 애벌레 기어 나오듯 본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꾀죄죄한 침낭 사이에서 40대 중반의 깡 마른 사내가 툭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제각각 승천할 듯 치솟아 있고, 양 볼은 퀭하니 말라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5살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내였다. 말간 그의 눈과 마주친 내가 멋쩍게 웃고 있는 사이 반대편 문으로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더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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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와 브라이언. 형은 LA에, 동생은 뉴욕에 살고 있는 이 쌍둥이 형제는 웨이브에 가보기 위해 몇 년째 함께 휴가 날짜를 맞춰 이곳을 찾는다 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우리 넷은 ‘혹시나 오늘은….’ 하는 마음으로 제비뽑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역시나 오늘도 두 팀 모두 실패. 이쯤에서 그만둘지, 좀 더 머물며 도전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이 형제가 다가왔다.


“우리는 오늘 벅스킨 걸치에 트레킹하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


벅스킨 걸치? 처음 듣는 지명이었지만 양 엄지를 추켜세우며 정말 멋진 곳이라고 부추기는 말에 졸래졸래 형제를 따라 나섰다.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 채…. 벅스킨 걸치는 세상에서 가장 좁고 긴 캐년이다. 총 20km에 달하는 이 긴 협곡은 경험이 아주 많은 베테랑 트레커들조차 마음 놓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건 나중에 안 사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10대 트레킹 코스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나중에 안 사실. 벅스킨 걸치 전체를 왕복하려면 2박 이상의 캠핑을 병행해야 하지만 우리는 당일로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통 체격의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비좁은 협곡이 나타났다. 평소엔 마른 협곡이지만 약간의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엔 협곡 사이로 빠르게 물이 차올라 금세 급류가 휘몰아치는 계곡으로 바뀐다 했다. 앞뒤 양 옆 어느 곳으로도 급류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으며, 사실 익사해서 죽는다기보단 센 물살에 휩쓸려 가다가 바위에 부딪혀 사망하게 된단다. 실제로 이 이 코스에서 목숨을 잃은 트레커들도 다수 있다는 스티브의 설명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적어도 오늘은 비 소식이 없다며 안심시키는 그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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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년이나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과 호스슈 밴드Horseshoe Bend 등 캠핑카 여행을 하며 둘러보았던 자연들은 모두 세상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형세를 자랑했지만 벅스킨 걸치야 말로 그중 최고봉이라 할 만했다. 협곡이라는 점에서 앤텔롭 캐년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 더 투박하고 거친 느낌. 자연 그대로의 자연, 그야말로 오지에 내던져진 느낌.


한껏 구부린 양팔과 몸통은 W자를 유지한 채 양 손바닥으로 협곡 벽을 꼭꼭 눌러 짚으며 안쪽으로, 안쪽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절벽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위로 인해 깊게 패인 곳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물살이 흐른 방향대로 빗살 무늬가 선명한 곳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느껴지는 듯했다. 직각으로 쭉 뻗은 절벽을 따라 고개를 치켜드니 조각난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캠핑을 하며 침낭에 누워 바라보는 밤하늘은 더욱 예술이라며 으쓱대는 스티브. 사실 말이 캠핑이지 침낭 하나에 몸을 맡긴 비박을 즐긴다 했다. 맨몸으로 맨땅, 아니 맨 자연에 누워 바라보는 은하수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데 그 광경을 직접 본 그의 양 어깨가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


다행히 정말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무사히 트레킹을 마치고 캠핑카로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스티브 형제의 반짝이는 눈망울에 동해, 들끓는 호기심이 이끌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벅스킨 걸치의 축복. 우리는 그 이튿날 거짓말처럼 더 웨이브 제비뽑기에 당첨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스티브와 브라이언 형제는 이번에도 실패. 하지만 카납을 떠난 며칠 후 스티브에게 이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자기들도 드디어 웨이브에 당첨되었다고. 벅스킨 걸치에서 살아나온 우리는 역시 운이 좋은 사람들이 틀림 없다.  





본문 속 여행지 미국, 카납(Kanab) 

카납은 콜로라도 평원 서쪽 해발 1,515m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카납과 카납 주변의 캐년에서 서부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를 다수 찍은 까닭에 유타의 작은 할리우드라고도 불린다. 대표적으로 역마차(1939), 딜론 보안관(1955), 엘 도라도(1966), 무법자 조지 웰즈(1976) 등이 있으며, 카납에서 2시간 내 거리에 있는 캐년만 꼽아도 그랜드캐년 노스림, 자이언 캐년, 브라이스 캐년과 더불어 벅스킨 협곡을 포함하여 앤텔로프 캐년, 더 웨이브 등이 있다. 말 그대로 캐년의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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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딸, 란이와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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