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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막 끝내고 신혼여행으로 떠난 세계여행 때의 일이다. 뉴욕에 도착한 지 열흘이 지난 즈음, 원래는 캐나다로 단풍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매일같이 회포를 푸느라 바쁜 남편은 뉴욕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말했다.“헤어져! 찢어지자고!” ‘일심동체, 영원한 한 몸’을 약속한 부부지만 그런 우리도 보고 싶은 게 다른 날엔 한 명은 미술관으로 한 명은 공원을 향해 등을 맞대고 ‘찌이익’ 분리가 되기도 했다. 아픈 남편을 호스텔에 혼자 두고 당일치기 섬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고…. 하지만 이번엔 일주일 이상의 긴 여정이 될 예정이므로 남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정말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함께 가겠다는 얘기는 안 하는군.)걱정스레 묻는 남편에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을 했다.


다음 날 새벽,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남편과 함께 뉴욕의 펜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연신 혼자 잘 갈 수 있겠냐 물으며 울상인 남편과는 달리 난 드디어 캐나다의 단풍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나는 기차에서, 남편은 플랫폼에서 애틋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우리는 멀어져 갔다. 하지만 막상 바퀴가 구르고, ‘삐익’ 경적이 울리자 커다란 파도와도 같은 긴장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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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옆자리가 유난히도 크게 눈에 들어왔다. 여행 중에도 일상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걸 시작할 때면 설렘과 두려움, 이 두 가지 감정이 늘 공존한다. 49퍼센트의 설렘과 49퍼센트의 두려움 사이에서 파도 같은 마음이 이리저리 일렁인다. 용기, 그런 마음속 두려움을 이겨내는 건 딱 2퍼센트의 용기다. 설렘이 두려움을 근소한 차이로 이겨낸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약간의 용기를 내자 입 안에서 짧은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아싸, 자유다!” 남편이 평소 눈치를 주는 것도, 잔소리를 하는 것도, 사생활에 간섭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미국과 캐나다를 잇는 ‘단풍 열차Maple Leaf Train’는 첫 목적지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9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지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창밖의 풍경에 지루할 새가 없었다. 단풍 열차라는 이름답게, 그 명성답게 허드슨 강 양 옆으로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나이아가라 폭포 역에 도착했다.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가만히 홀로 서 있으니 부서지는 물보라 사이로 재잘대는 새들의 대화까지도 오롯이 다 내 것인 듯했다.


혼자만의 여행은 함께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니 알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이 넘쳐났다. 거리의 잘생긴 청년을 당당하게(?)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도 지을 수 있었고, 추근대는 외국인의 추파도 은근히 즐길 줄 알게 됐다. 이후로도 혼자 버스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고, 혼자 공원을 산책하며 잔디밭을 뒹굴었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난전 머리핀을 살지 말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독립의 길 위에서는 혼자 먹는 밥조차도 자유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화장실 갈 때 짐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점만 빼면, 모든 게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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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퀘백Quebec에서 터졌다. 캐나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과 겹친 주말이었던 탓에 내 몸 하나 누울 침대가 단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였다면 한 명은 카페에 앉아 짐을 지키고, 다른 한 명이 맨몸으로 숙소를 알아보면 됐겠지만 모든 짐을 그대로 둘러메고 경사가 심한 퀘백시티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남편이 보고 싶었던 날… 점심 시간 경 도착한 퀘백시티에서 해가 질 무렵까지 숙소를 찾느라 헤맸던 기억….  다행히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유스호스텔에서 딱 한 자리 남은 구석자리 침대를 찾을 수 있었고, 그리운 남편의 얼굴은 다시금 마음 깊숙이 묻히고 만다. 지금은 혼자, 혼자만의 자유를 즐길 시간이니까!


하지만, 혼자 떠난 여행, 열흘 간의 분리, 이 자유로운 혼자의 감정이 전혀 외롭지 않은 이유는 언제든 다시 합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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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6살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하던 중 팬데믹으로 인해 취소. 현재 캠핑카로 전국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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