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600일이 되던 날(두 돌이 채 안되었을 무렵), 우리는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처음 떠나는 가족 여행인 만큼, 아이의 낮잠 시간을 고려한 동선은 물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한 비상 계획까지 꼼꼼히 준비했다. "완벽한 계획이니 문제없을 거야"라며 자신했지만, 여행은 시작과 함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준비한 많은 것들, 분 단위로 짠 계획은 실상 내 중심의 허황된 바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에게 시차 적응을 기대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현지 시간 새벽 2시에 깨어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낮잠 시간을 고려한 동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밤중에 호텔 방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 때문에 우리 부부는 며칠째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행 중반, 스케줄표를 박박 찢어버리고 마는데……

로키 산맥에서 맞닥뜨린 시련
여행 닷새째, 그날은 아이스필즈 파크웨이를 타고 재스퍼에서 밴프로 이동하려던 날이었다. 며칠째 잠을 설친 얼굴엔 다크서클이 짙었지만, 재스퍼의 하늘만큼은 구름 푸르고 쾌청했다. 우리는 드디어 로키 산맥의 진면목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잔뜩 들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산악 경관을 자랑하는 이 드라이브 코스야말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했다.
“어? 길을 잘못 든 거 아냐?”
“그럴 리 없어. 재스퍼와 밴프를 잇는 길은 이거 하나 밖에 없거든.”
당황한 남편의 목소리가 가 닿은 곳엔 ‘Closed’라고 적힌 커다란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방금 전 지나쳐 온 인포메이션 센터로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확인해보니 지난밤 내린 폭설 때문에 제설 작업을 해야 하는데, 강풍이 부는 구간이 있어 언제 작업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날이 이렇게 맑은데 강풍이라니? 산세가 워낙 험한 로키 산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열흘, 마냥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밴프로 가는 걸 포기하고, 예약했던 호텔들도 모두 취소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날은 어두워졌고, 어쩔 수 없이 이름 모를 어느 허름한 모텔로 들어섰다. 전자레인지가 없어 즉석밥을 데워 먹을 수도 없는 상황. 완벽했던 계획은 이제 완벽하게 엉망이 되었다. 내일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우연이 선사한 최고의 순간
그런데, 이상했다. 내일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우리는 허름한 모텔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웰스 그레이 주립공원’이란 곳으로 향했다. 길 양쪽엔 무릎 높이부터 어른 키만큼 쌓인 눈이 가득했지만, 현지에서 알게된 정보 덕분에 비밀스러운 오솔길을 찾을 수 있었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에서 나니아로 들어가는 옷장의 비밀 통로를 모르면 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듯이 비밀 오솔길에 대한 정보를 몰랐다면 포기하고 되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엔, 정말 비밀 길이 있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은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은 헝클어진 계획으로 심란해진 내 마음을 차분하게 식혀주었다. 사실 짜인 일정에 맞춰 움직이려니 갑갑한 마음이 들려던 참이었다. 계획한 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날 하루 제대로 여행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 찰나였다.
10분쯤 들어가자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치도 못한 광경. 산세로 따지면 남미의 이과수 폭포나 북미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기이하고도 웅장한 풍경이었다. 겉면이 얼어버린 폭포 안쪽으로 얼지 않은 물줄기가 세차게 떨어졌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겹겹이 쌓인 유리관을 타고 흐르는 거대하고도 기이한 폭포 같았달까? 이곳이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 이토록 멋진 자연이 사진에 다 담기지가 않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사진의 15배쯤 멋진 광경!

이후 우리는 더 이상 미리 알아본 맛집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길거리 마음에 드는 음식점에 들어가 각자 좋아하는 메뉴를 골랐고,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추천한 장소를 여행했다. 어떤 도로를 선택하더라도 이번 여행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아찔한 풍경들이 펼쳐졌기 때문에 구겨 버린 계획표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계획을 버렸기에 누릴 수 있었던 우연의 기쁨들, 그것이 이번 여행이 우리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

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세계 여행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