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 ·사진 오재철

        

4개월로 계획했던 중남미 여행이 7개월로 길어진 건 예상보다 훨씬 거대하고 매력적인 대륙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남미 최고의 항구 도시인 발파라이소 역시 많은 것들을 내보여주고 속 깊은 이야기들을 들려준 곳이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보통은 당일치기로 들리지만 우리는 꼬박 3일을 머물렀다. 원래는 ‘하루면 충분히 둘러보겠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직접 가본 발파라이소는 추후 일정을 모두 수정할 만큼 좋았다. 이런 게 장기 여행자만이 취할 수 있는 호기로운 여유라 할 수 있겠지!


발파라이소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처럼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도시이다. 해안과 접해있는 언덕 아래쪽은 오피스와 가게들이 몰려있고 높은 쪽이 주거지라서, 우린 호스텔을 찾아 위로 위로 올라가야 했다. 언덕 경사면이 어찌나 높고 가파르던지 ‘아센소르Ascensor’가 아니었다면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어떻게 숙소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아센소르는 스페인어로 ‘승강기, 엘리베이터’라는 뜻이고, 발파라이소의 엘리베이터인 아센소르는 매우 독특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언덕 경사면의 낮은 지대와 높은 지대 사이에 레일을 깔고 그 위를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를 떠올리면 된다. 19세기에 만들어진 10여 대의 아센소르를 아직까지 사용 중이라고 하는데, 한 번 타는 데 1인당 약 4~500원 정도로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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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은 워킹 투어 가이드인 필립과 함께 도시를 둘러보았다. 그도 발파라이소 출신은 아니라 했다. 우연히 들른 이 도시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몇 년째 머무르고 있다고 말하는 필립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발파라이소를 사랑하는지, 얼마만큼 자랑스럽게 여기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나라가 아님에도 저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 난 대부분의 설명을 못 알아들었고 그나마도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한 가지 확실히 기억나는 건 발파라이소 건물들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19세기, 가난한 이민자들이 발파라이소에 정착하던 시절, 집을 지을 재료가 없자 항구에서 선박이나 컨테이너를 만들 때 쓰이는 철판을 주워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후에 색색의 철판 벽 위에 하나 둘씩 그래피티가 늘어났고, 세상에 둘도 없는 매력적인 도시로 거듭나게 되면서, 2003년에는 발파라이소의 역사 지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고 한다. 필립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도시의 골목을 걷다 보니 그의 목소리인지 벽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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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대로라면 둘째 날엔 산티아고로 넘어가야 했지만, 발파라이소의 개성에 큰 흥미를 느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좀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다음날은 남편과 단둘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탐방하기로 했다. 호스텔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제 느낀 사물들의 소리가 좀 더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요리 조리 뻗어있는 산비탈의 골목들과 투박하게 쌓아 올려진 담벼락들, 심지어 거리의 전봇대와 쓰레기통까지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걸음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도시 전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만나서 반가워. 우리처럼 수준 높은 그래피티는 처음이지?”, “좀 엉뚱해도 괜찮아, 더 멋진 상상을 펼치며 네 인생을 살아도 좋아!”, “너는 지금 행복하니? 이 그림처럼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니?” 발파라이소는 말 없는 수다쟁이 같았다. 도시와 나는 끊임없이 그림과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발파라이소의 역사 지구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이름 모를 예술가들의 삶과 철학, 기상천외한 상상력들이 가득 펼쳐졌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저마다의 벽화에 그럴싸한 제목을 붙이며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이 바라보느라 한참을 벽화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래서인지 유명한 미술관에서 본 명화보다 발파라이소의 거리 벽화 하나하나가 지금도 더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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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 것 없는 낙서 하나가 칠레, 아니 세계 곳곳의 예술가들을 불러모아 하나의 예술구가 된 도시. 발파라이소는 내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벽화 예술의 끝을 보여주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조언도 함께 해주었다. 정갈하고 안정된 미술관 속 고귀한 작품 같은 삶도 좋지만, 다소 지저분하고 불안정해보여도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발파라이소 거리의 벽화 같은 삶이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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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발파라이소

발파라이소는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9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평양과 면한 남아메리카 제 1의 무역항이다. 1848~1914년에 유럽 출신의 이주민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이주민 문화가 특히 발달하였다. 이주민들은 이 도시의 건축 양식에 자신들의 문화를 융합하여 각각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이루었고, 그 결과 2003년 발파라이소의 역사 지구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면서 관광 산업도 활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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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 정민아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을 출간했으며,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딸과 함께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다.

유튜브에서 ‘란아 세계여행 가자’를 검색하면 이들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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