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이어진 푸른 수평선, 손 내밀면 닿을 듯한 하얀 뭉게구름, 어깨가 절로 들썩여지는 신나는 레게음악.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한 손으로 살포시 그 빛을 가리고, 다른 손엔 얼음이 들어간 후르츠펀치.


“저기 좀 봐! 돌고래 가족이 우릴 뒤따르고 있어!”


정글북 속 늑대 소년 모글리를 닮은 닉이 날 부르며 외쳤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우리가 탄 요트를 따라오는 돌고래 무리들이 푸른 파도를 가르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에메랄드빛 카리브해 위에 우뚝 서 있다. 불어오는 바람을 가르며 말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냐고? 아니, 이것은 15명의 친구들과 함께한 나의 리얼 요트 투어 이야기. 현재는 떠날 수 없기에 부쩍 그 눈부시던 나날들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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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즈의 키 코커라는 작은 섬을 배회하던 중 눈에 들어온 작은 간판. ‘2박 3일의 요트 투어 여행자를 모집합니다. 요트를 타고 바다 위를 가르며 카리브해를 유유히 누비는 모습을 상상한다. 고민할 게 뭐 있나. 당연히 OK! 



세일링을 떠나는 날 아침이 되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15명의 여행자들과 캡틴 케빈, 그리고 선원 둘이 출항 준비 완료. 처음 만난 이들의 서먹함은 ‘라저 킹’ 호를 타기 직전 벗어던진 신발과 함께 한방에 사라졌다(요트 투어를 하는 동안 신발은 필요 없기 때문에 출발 전 신발을 모두 벗어 한곳에 모아놓는다). 신발과 함께 일상의 모습도 벗어던진 걸까? 모두들 소풍날 아침의 아이들처럼 설렘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뱃머리, 갑판 위, 뱃꽁지 등 각자의 취향대로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 눈을 떠도, 두 눈을 감아도 코끝을 스치는 바다 내음이 한가득 불어온다. 드디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요트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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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저 킹 호는 넓고 으리으리한 크루즈가 아니다. 선원과 승객 15명이 옹기종기 모여앉거나 누우면 꽉 차는 아담한 돛단배 같은 요트일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한정된 공간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바다 보기, 낮잠 자기, 점심 먹고 스노클링, 멍때리며 낚시하기, 그리고 다시 바다 보기를 무한반복하기를 수차례.


어느새 첫날밤을 보낼 무인도에 다다랐다. 100m 달리기를 하면 끝나버릴 것 같은 크기의 섬. 야자수 한 그루만이 유일한 주민인 무인도는 만화책에서 꺼내온 듯한 너무나도 작고 귀여운 섬이었다. 샤워를 못한다는 말도 이 아담한 섬에서 머무르는 ‘낭만’에 비하면 일말의 성가심이 되지 않았다.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작은 섬, 그 섬을 지나가는 바람을 덮고 누워 달빛에 반짝이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밤하늘에 새겨진 별처럼 또 하나의 추억이 그렇게 가슴속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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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아침이 밝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요트에 올랐다. 오늘의 내 자리는 배 꼭대기 갑판 위. 어제와 다름없이, 한결같이 잔잔한 바다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 맨몸뚱이로 덜컥 빠졌으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발 뻗고 앉을 수 있는 이 배 한 척이 뭐라고 바다가 이토록 아름답고 편하게 느껴질까? 레게음악 들으며 바다 보기, 갑판 위에서 낮잠 자기, 점심 먹고 스노클링, 또 누군가는 멍하니 낚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의 세일링이었지만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오늘의 기착지는 어제보단 조금 크지만 그래봤자 섬 한 바퀴를 다 둘러보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섬. 저녁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캡틴 케빈과 익살맞은 선원 셰인,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선원 칠로가 실력 발휘 제대로 해서 우리들의 만찬을 준비해주었다. 이름하야 ‘랍스터 파티!’ 함부로 구경도 못해본 랍스터가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있다. 우리 모두의 배를 랍스터로만 채워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어마 어마한 양이라니. 그때 갑자기 캡틴이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작디작은 섬의 밤하늘에 자그마한 폭죽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우리 모두는 서로를 얼싸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내일이면 모두들 헤어져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테지만 이 순간 함께한 15명은 마치 미지의 섬에 표류한 《15소년 표류기》 속 주인공이 된 듯 마지막 밤을 함께 즐겼다. 아름다운 밤이다. 아름다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는 그런 밤 말이다. 그밤이 떠오른다. 





본문 속 여행지  벨리즈, 키 코커 

북쪽으로는 멕시코, 서쪽으로는 과테말라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온두라스만, 동쪽으로는 카리브해와 접해 있다. 국토 면적 22,966㎢(남한의 1/4 정도)에 인구 30만 명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나라는 중남미 국가 대부분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데 반해 영국의 식민 아래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영어를 쓴다. 본문 속 여행지는 벨리즈 시티에서 쾌속 보트를 타고 45분을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한 키 코커. 기다란 타원형으로 생긴 이 섬은 걸었을 때 짧은 지름이 15분 남짓, 긴 지름은 2시간 정도면 끝에서 끝까지 닿을 수 있는 작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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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딸, 란이와 두 번째 세계 여행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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