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024년 3월, 인공지능의 도입이 지반공학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권두언을 통해 이야기한 바 있다. 당시에는 ChatGPT, Tesla의 FSD와 같은 사례를 통해 다른 공학 분야에 비해 지반공학에서의 인공지능 활용이 다소 평면적이라는 우려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 사이, AI 기술은 ‘혁신’을 넘어 ‘파괴적 전환’을 이끄는 기술로 진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공지능에 대한 두번째 권두언을 집필하게 되었다.
최근의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은 단순한 텍스트 처리 기능을 넘어서, Chain-of-Thought(CoT) 프롬프트를 통해 복잡한 문제를 논리 단계로 분해하고 중간 추론 과정을 보여주며, 오류를 줄이고 투명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2025년 1월 공개된 오픈소스 모델 DeepSeek-R1은 지도학습 없이도 ChatGPT 수준의 추론 성능을 달성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행정 자동화 도구로 간주되던 LLM은 이제 추론 능력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인공일반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의 실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AGI는 인간처럼 다양한 문제를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주도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인공지능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AGI가 2~7년 내에 현실화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술적 전망 또한 구체화되고 있다. AGI는 물리적 법칙과 데이터 기반 학습이 결합된 물리 AI와 연계되어 복잡한 물리 현상을 이해하고, 인간과 협업하며,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주체로 진화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단순 반복을 넘어, 주관적 판단과 복합적 변수 조율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가진다.
지반공학은 바로 그런 학문이다. 불확실성과 임의성, 공간적 변이성이 큰 자연재료를 다루는 지반공학자에게는 데이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공학적 판단이 요구된다. 지반조사 결과 분석, 설계지반물성 산정, 주상도 작성, 수치해석 수행 및 분석, 공법 선정, 모니터링 평가 등 모든 단계에 걸쳐 엔지니어의 고유한 판단이 필요하며 이는 자연어 형태로 문서화된다. 이들 문서는 단순한 보조 정보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기록’이다. 따라서 지반공학 분야의 AI 개발은 수치 데이터만을 다루는 전통적 모델을 넘어, 자연어 기반 문서를 학습하고 추론할 수 있는 LLM 기반의 하이브리드 모델로 진화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자동화가 아닌, 인간과 AI가 협업하는 ‘의사결정 공동체’로서의 기술 구현을 의미한다.
물론 여전히 AI는 단순한 예측 도구로 인식되고 있으며, 인간의 판단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AI는 ‘데이터 기반 판단’과 ‘지식 기반 추론’의 결합을 통해 엔지니어의 협력자로 진화하고 있으며, 그 전환이 이제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지반공학 분야에서도, AI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세계지반공학회(ISSMGE)는 2018년부터 Future of Machine Learning in Geotechnics(FOMLIG) 워크숍을 개최해 왔으며, 올해 10월에는 제3회 행사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진행된다. 또한 싱가포르국립대학교의 Kok-Kwang Phoon 교수는 2024년 9월에 Elsevier와 함께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반 학습을 다루는 Geodata and AI 논문집을 출간하였고, 연구의 신속한 확산을 위하여 향후에는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arXiv와 같은 개방형 플랫폼을 통해 최신 연구를 공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리 학회 역시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제21대 집행부는 AI기반 설계·해석 도구 개발과 교육 프로그램 기획, 타 학회와의 공동 워크숍 등을 추진할 디지털특임위원회를 신설하였다. 또한 지반 IT융합기술위원회는 드론, IoT, 스마트 건설, 인공지능 등과 지반공학의 융합을 통해 기술 실증과 현장 확산을 주도하고 있으며, 신뢰성한계상태설계법 연구회는 제4회 FOMLIG 국제 워크숍을 서울에서 개최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다.
이제 인공지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AGI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중심에 서야 한다. 인공지능 학습의 핵심은 양질의 데이터에 있으며, 이를 확보하기 위해 학회를 중심으로 산·학·연·관의 긴밀한 협력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학회가 인공지능 시대의 기술 윤리, 공공성, 표준화까지 아우르는 플랫폼이자 리더십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집단지성과 협력, 그리고 학회의 비전 있는 리더십을 통해, 40년 역사의 한국지반공학회가 인공지능 기술을 선도하는 전문 커뮤니티로 도약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