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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발악이었던 것일까?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숫자 2가 붙었을 때는 이적의 노래들로부터 위안받았었다. 30대로 넘어갈 때는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몇 해 전 마흔 살이 될 즈음에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들이 큰 힘이 되었으며, 정밀아의 속삭이는 노래들이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40대가 될 때는 이런 노래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악으로 앞으로 달리기만 했던 30대의 끝자락에, 그토록 원했던 고국으로 돌아오고, 그토록 원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일들에 여전히 치이다가 이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는데, 막상 잠시 멈추려고 보니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흔. 인생을 반 정도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엉거주춤 서서 뒤를 돌아보니, 온 길은 까마득해 보여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아찔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이 길을 와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또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 나이 마흔의 의미인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살날이 점점 줄어들면 어떤 느낌일까? 나중에 돌아봤을 때 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되는 건가. 정밀아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정말로 나는 어른이 된 건가. 진짜 이렇게 살면 되나. 마음이 이리저리 구르는 밤.” 20대 때 즐겨 듣던 이적의 노래도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꿈은 외롭고, 맘은 붐비고, 내 핏속엔 무지개가 흐르나 봐.”


이러한 상념들이 가득한 시기에 니체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으로 나에게 니체를 권한 것은 아버지였다. 2019년 어느 날 저녁 식사 중에, 어떤 교수님이 니체에 대해서 강의를 잘하니 한 번 시청해보라는 권유였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말씀은 한쪽 귀로 잘 흘려보냈었다. 2년 정도 지난 후, 우연히 니체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고, 그야말로 첫눈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찾아보니 니체에 대한 강의나 방송을 하는 여러 전문가가 있었다. 대부분의 방송에서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게 재미를 느끼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조금만 이해하면 그 위대함에 흠뻑 빠져든다고 했다. 특히, 니체가 이야기하는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은 더더욱 니체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내 흥미를 세게 당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장희창 옮김)”를 구매하여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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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어렸을 때 한 번쯤 슈퍼맨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날고, 무거운 것도 들어 올리는 그런 슈퍼맨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슈퍼맨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사실, 그런 영화들을 즐겨 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우리가 초인, 그러니까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일출 오프닝 장면에 나오는 관현악곡의 쿵쾅쿵쾅 치는 북소리처럼 말이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초능력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초인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독일어로는 “위버멘쉬”라고 한다. “위버”는 영어로 “over”, 또는 “super”라는 뜻이고 “멘쉬”는 “man”이다. 그러니까, 영어로는 “over man”이나 “superman”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위버”는 무엇인가를 넘어가는, 능가하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자신을 극복하고 기존의 가치를 능가하는 사람을 뜻한다. 초인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낡은 것들을 깨부술 줄 아는 사람이다. 높은 곳을 지향하며 살아가되, 내려올 줄도 아는 사람이다. 고독과 방랑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니체를 처음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조금 더 일찍 니체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한참 읽으면서 그런 아쉬움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니체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는 것만 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물론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의지에 순응하는 아이였지만, 마음 한편에는 작은 반항의 심지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 때는 자유롭게 놀았다. 주변에서 공부 좀 하라고 그렇게 걱정할 때도 마음껏 놀았다. 여한이 없었다. 그러다, 3, 4학년 때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특별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러 나갔었다. 정말 여한이 없이 열심히 공부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학원에 진학해서 더 공부했고, 여기저기 다니며 경력을 쌓았다. 계속 공부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꿈을 조금이라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마흔이 넘도록 혼자 지낸다.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언제나 혼자였지만, 그리 외롭지는 않았다. 이제 곧 혼자가 아니게 되면 다시 갖지 못할 기회라 생각하며 이 고독을 즐긴다. 덕분에 이렇게 니체도 만났고, 그에 대해 글도 쓰고 있으니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아직은 후회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며 살아왔다. 


나는 창작을 좋아한다. 예전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대학생 때에는 열심히 클래식기타를 쳤다. 군대에서도 기타를 얼마나 치고 싶던지(원래 못하게 되면 더 하고 싶어진다), 훈련과 일 중간 틈틈이 악보를 암기하여 머릿속으로 기타 지판과 줄을 상상하면서 연습했다. 결국 그토록 연주하고 싶었던 “Tango en Ska”와 “Baden Jazz 1악장”을 완성했을 때 받았던 그 희열은 잊을 수 없다. 요즘에는 미술과 사진을 많이 좋아한다. 감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직접 그리고 찍으면서 창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쓰고 싶어지고, 좋은 연주를 듣다 보면, 내가 직접 연주하고 싶어지고, 노래도 만들고 싶어진다.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 의지가 강하다. 예술적 재능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의지만큼은 크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지금 하는 일, 그러니까 연구도 창작의 일종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니,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지루하지 않고, 늘 새로우니 말이다. 앞으로도 즐겁게 연구하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글도 쓰며 살아가면 행복할 것 같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그런 것들을 거침없이 해 나가는 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을 삶이다. 다시 말해,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많은 생각들을 해야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안타깝게 먼저 떠난 신해철이 노래한 것처럼 말이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네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그 원하는 것을 강렬히 욕망하면 저절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밤 11시에 자는 것도 어렵지 않고, 아침 6시에 일어나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능동적으로 삶을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삶은 희열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니는 평범한 거리를 거닐어도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초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 그들에게는 매일 보는 바람에 나풀나풀거리는 나뭇잎, 풀잎도 큰 감흥으로 다가온다.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 무언가를 창조해 왔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자. 그러지 않는다면 아예 살지도 않겠다.   

내게는 있는가, 아직도 목표가? 나의 돛이 향해 달려가는 항구가?  

순풍은 불어오는가? 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자만이 어떤 바람이 적당하고 어떤 바람이   자신의 순풍인지를 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러므로 부디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웃는 것을 배우라! 그대들  의 마음을 고양하라, 그대 멋지게 춤추는 자들이여, 높게! 더 높게! 그리고 멋지게 웃음 짓는 것도 제발 잊  지 말라!”



긍정


니체는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의 다른 저서 “이 사람을 보라” 중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한 나의 처방전은 아모르파티이다.   

있는 그대로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히.   

필연적인 일을 단지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두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를 알 것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활용한 쉽고 흥겨운 후렴구가 인상적인 노래이다. 절로 춤을 추게 하는 매력적인 노래이다. 그래서, 노래 제목과 가사에서 “파티”가 영어로 “party”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았더니,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였다. 여기서 “파티”는 “fati”. 운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모르(amor)”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운명”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치유하는 기적을 바라는 이들에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그러한 장애가 사라질 것을 바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장애가 있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고, 그것을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너무 비관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을 기다릴 바에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사랑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초인으로 건너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물질적 크고 작은 결핍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결핍을 생각하는 만성적인 의식을 콤플렉스라고 한다. 니체는 그러한 결핍을, 또 그런 결핍을 본인에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남과 운명을 탓하며 비관에 빠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능동적으로 사랑하며 힘차게 살아나갈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그런 결핍들은 이미 과거에 발생했으며, 과거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를 사랑하며, 현재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라는 것이다. 과거에 순응하여 안주하라는 것이 아니다. 힘차게 현재를 살며 미래를 맞이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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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이 대목에서 나는 또다시 큰 전율을 느꼈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30번의 서주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내가 좋아하는 방탄소년단이 “Love yourself”라는 제목의 앨범을 세 장 내고 활동하면서 전 세계 팬들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전파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DNA, IDOL, MIC Drop 같은 곡들이 이 앨범들에 수록되어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것이 마땅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남을 배척하고, 자기만을 위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그 사랑을 타인에게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기를 탓하고, 주변이나 환경을 탓한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나는 능력도 없고, 되는 일이 없어.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만 집착할 뿐, 미래로 나갈 용기를 낼 수 없다. 난 잘 생기지도 않고 특별한 재주도 없어.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도 없어. 하지만 괜찮아.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 없어. 난 내가 좋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거야. 이러한 긍정이 있으면 초인이 될 수 있다. 자기와 과거를 넘어가는 초인 말이다. 


“그대들의 이웃을 언제나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지만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돼라!”


“인간은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어느새 또 한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흔 살, 생의 한가운데에서 마흔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를 운명처럼 만났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는 이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스스로를 고독하고, 번민 끊기지 않는 방랑자라고 생각했을 때, 망치를 든 니체를 만났다. 니체는 낡은 것은 깨부수고, 자신을 넘어, 위로, 더 위로, 높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힘차게 이야기한다. 삶은 기쁨의 샘이며, 나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라고 한다. 고독도 사랑해야 하며, 내려오는 길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따뜻하게 위로한다.      


어느새 또 한해가 지나가고 있다. 내 인생의 하루는 오후 네 시를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좋아하는 노래 구절이 생각난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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