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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 주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

(cj32@kangwon.ac.kr)





1. 개요


지난해 학회지에 게재된 NGI 신윤섭 박사님의 기사(2020. 9월호 학회지)를 재미있게 읽고서 문득 25여 년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용기를 내서 본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태국 AIT에서의 석사과정이 끝나갈 무렵 매일 학교로 배달되던 국내 한 신문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A 건설에서 경력직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길래 별 생각 없이 지원하였다(그림 1). 당시엔 일간지 1면 하단에 건설기술자 구직 광고가 흔히 게재될 정도로 건설경기가 좋았었다. 몇 달 후 귀국하니 회사에서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이와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는데 면접하시는 분이 토익점수를 묻더니 갑자기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시는데…. 처음엔 Let me introduce myself …. 그리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 다행히 겨우 합격했고 실무를 전혀 모르지만 석사학위가 있다고 해서 경력사원으로 입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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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필자는 비슷한 시기에 B 시공사에서도 면접을 봤는데 이건 더 가관이었다. 태국에서 입사지원서를 자필로 작성해서 팩스로 보냈던 것 같은데, 면접시 질문 &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면접관: 입사지원서 본인이 자필로 쓴거냐?

나: 네.

면접관: 정말로 회사에 올 마음이 있느냐? 어쩌면 이렇게 엉터리로 지원서를 작성할 수 있냐?

나: 당연히 올 생각이 있으니 지원했습니다. 제가 워낙 악필이라서…..


사실 악필은 핑계였고 별 생각없이 대충 작성해서 팩스로 보냈으니 면접관이 기가 막혀 할 만도 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을 했으니 취직하기 참 쉬웠던 시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회사의 경우 신입사원은 무조건 현장으로 배치한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물론 바보 같은 생각) 신입사원 교육에 참석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 현장에 배치되어 신입사원으로 근무를 했더라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또한 C 설계사에서도 아주 간단한 면접을 보고 면접 다음주부터 출근을 한다고 해놓고선 며칠 후 안 간다고 전화로 간단히(?) 통보를 했으니 덜떨어졌던 시절의 무척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1995년 당시 건설사의 연봉보다 설계사의 연봉이 약간 더 많았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결국 A 건설 토질팀으로 입사를 한 게 필자에겐 신의 한수였고 인생에게 가장 잘한 선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그림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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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시설과 말뚝


당시의 A 회사는 토목사업보다는 건축 & 주택사업의 비중이 더 높았다. 그러다 보니 소위 부대토목이라고 불리는 각종 건축구조물의 건설과 관련된 가시설 & 말뚝 설계 등이 업무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철부지 시절 이러한 사실에 자괴감과 절망감을 느낀 나머지 사석이나 술자리에서 이를 하소연 하다 선배님들로부터 여러 차례 불벼락을 맞았다. 그럼에도 근무하는 2년 동안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역시 D 아파트 건설공사 기술지원이었다. 프로젝트 시작부터 관여되어 부대토목의 대부분을 담당하면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즉 가시설 및 말뚝은 물론이고 부력앵커, 콘크리트 타설, 각종 민원, 소규모 사면, 연약지반 등 사실상 터널을 제외하고는 지반공학 대부분의 분야를 다양하게 섭렵해 볼 수 있었다.


D 아파트 건설을 위해서 지하주차장, 전기시설 및 정화조 건설 등 각종 터파기공사 흙막이 가시설이 다양하게 계획되었다. 현장의 시공조건상 앵커 및 버팀보 시공이 거의 불가한 상황이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GL-0.5m에 tie-rod를 설치하고 sheet pile 을 이용해서 매립토/풍화토 지반에 일종의 자립식 형태의 흙막이를 설계했다(굴착심도: 대략 5-8m)(그림 4). 지금이라면 불안해서 그렇게 설계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현장에서는 매우 만족해 했고 가시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떤 부장님이 필자에게 도전적인(실은 불안해 보이는) 설계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현장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 주었다고 높은 분으로부터 칭찬도 받고 이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공사비: 1.3억 절감 & 공기: 2개월 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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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및 지하주차장의 기초로는 SIP 말뚝이 적용되었는데 아파트에 시공되는 말뚝에 대한 시항타가 진행될 때 건축감리원이 계속 라떼는…. 하면서 쓸데없는 헛수고 한다며 빈정거려서 사원 주제에 가볍게 대들기도 하는 등 작은 실랑이도 있었다. 당초 지반조사 자료를 근거로 말뚝의 각 위치별 예상 근입심도를 결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항타가 진행되었는데, 말뚝의 실제 근입심도는 당연히 큰 차이를 보였다. 시항타 후 본 시공을 진행하면서 수행한 동재하 시험결과는 설계지지력인 55톤을 크게 상회하여 현장의 기술자는 물론 필자 역시 이 지역은 말뚝의 지지력이 잘 발현되는 모양이라며 안일한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SIP 시공용 PHC 말뚝은 당초에는 350mm 직경으로 설계가 되어 있었으나, 토질팀에서 안정적인 지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를 400mm로 변경시켰는데 괜한 일을 했다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SIP의 최종시공 단계인 경타작업시 최종관입량(도마리)를 알려달라고 요청해서 항타공식을 이용하여 8-10mm/타 정도의 수치를 현장에 제시했다. 한편 현장에선 소장님이 추가 안전율 적용 또 공사과장님이 안전율을 한번 더 적용하는 등 안전율이 2회 더 적용되면서 결국 실제 항타 작업시엔 도마리가 5mm/타 미만으로 관리되었다. 현장에선 일부 직타 말뚝도 시공되었는데 기시공된 말뚝이 인접말뚝이 타입되는 과정에서 약간 솟아오르는 문제가 발생하여(당연한 현상이지만) 이에 대한 기술검토도 수행했다.


현장에서 수행된 동재하 시험 결과에 의하면 대부분 말뚝의 설계지지력이 100톤을 상회할 정도로 지지력이 큰 것으로 평가되어 모든 관련 당사자들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말뚝공사의 마지막 위치였던 한 지하주차장을 지지하기 위한 말뚝을 시공하는 과정에서 드디어 올 게 왔다. 그동안 말뚝의 지지력이 워낙 크게 산정되었기 때문에 이 지하주차장의 경우는 시험시공 없이 본시공을 바로 진행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일개 대리 1년차가 현장의 공사과장님에게 얘기했고, 실제로 그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전체말뚝의 절반 정도가 시공된 상황에서 기시공된 말뚝 4본 정도에 대한 동재하시험을 실시했는데 모든 말뚝의 지지력이 미달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후 엄격한 관리하에서 추가 시공된 2본 말뚝의 지지력도 미달 되었다. 결국 2달 정도의 논의 후 기시공 된 SIP 말뚝 옆에 직타공법으로 보강말뚝을 시공하여 주차장 기초의 안정성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항타시 발생하는 진동으로 인한 인근 아파트 건물에서 진행중인 콘크리트의 양생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어, 항타시 진동을 측정했으나 천만다행으로 측정된 진동치가 기준치 미만이라서 항타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여기에 적용된 말뚝은 평상시엔 수직하중을 지지하고, 부력 작용시는 인발에 저항하는 이중 기능을 갖도록 설계되었다(인발저항력 10톤). 


돌이켜 보면 이 지하주차장의 지대가 낮은 편이고 지하수 흐름이 상당히 빨라서 SIP 시공시 시멘트풀이 양생 되기 이전에 주변지반으로 상당수 유입되어, 마찰저항력이 크게 저하되어 그런 현상이 발생한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터파기가 종료되어 말뚝시공만 끝나면 바로 기초 콘크리트 타설이 가능한 상황인데, 말뚝공사가 지연되니 지하수는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굴착바닥면은 점점 연약해지고 시공비용은 늘어나고…. 당시 필자는 유학 준비로 머리가 충분히 복잡한 가운데 이 문제까지 겹쳐서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특히 필자로 인해 유발된 손해(최소 1 억원)를 퇴사하기 전에 보상해야 하는 줄 알고 정말로 끙끙 앓았다. 시항타를 무심코 건너뛴 대가는 너무도 컸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시설 분야에서는 현장에 나름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런 공을 말뚝공사에서 다 날려버렸다. 물론 이런 시련을 통해 정말로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은 이를 학생들에게 이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에는 가시설 해석에 Sunex, Wallap, Excav 등이 널리 사용되고 일부 기술자들의 경우 Flac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시설 해석이 끝나면 그 결과를 Mathcad를 이용하여 구조계산을 했다. 하지만 그 세세한 계산과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각 부재의 안정성에 대한 OK or NG 여부만을 살폈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자로서 낙제점을 받아 마땅한 그런 형편없는 마음가짐을 신랄히 자아비판(?) 하면서 그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이후 CAD를 이용하여 가시설에 대한 도면작업을 했다(아직도 일부 도면을 보관하고 있다). 처음엔 CAD를 전혀 몰랐지만 간단한 명령어 몇 개만 배우면 크게 어렵지 않게 도면을 그릴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내역서 작성작업을 하지 않아 그 부분만큼은 여전히 필자에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기술지원차 현장에 방문하여 필자가 작성한 도면 그대로 시공되어 있는 가시설을 보면서 나름대로 커다란 성취감에 들뜨기도 했다. 심지어는 대리 주제에 shop drawing을 그려서 업무지시를 하기도 하고 참 대단한 시절이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필자가 관여했던 모든 것들이 땅속에 묻혀 있지만 그래도 그 지역을 지날 때면 그 아파트 단지 방향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게 된다.





3. 이런저런 기억들


입사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현장 출장을 갔는데 아마 현장을 느껴보라는 팀장님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랭이가 현장을 간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뜬금없이 토목시공학 책을 한 권 들고 갔다. 현장계측 실시 및 데이터 분석이 그 목적이었는데 필자는 그냥 선배들 따라다니면서 밥만 열심히 먹었다. 저녁식사를 하러가서 각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인원수 대로 보신탕을 주문할 때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필자가 즐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먹을 수는 있어서 다행). 그런데 반주를 상당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로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여 야근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았으며, 앞으로 직장 생활이 쉽진 않겠다는 염려를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SIP 말뚝 대참사를 제외하고는 선배님들 그리고 동료들의 배려와 도움 덕분에 큰 과오없이 무난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주업무는 부대토목 관련 흙막이 가시설 설계 및 말뚝 시공관리 이었지만, 지반분야 다양한 공종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기도 했다. 한번은 현장을 전혀 방문하지 않고 차장님이 현장에서 측정해 오신 암반의 주향/경사 등 face mapping 자료만을 가지고 암반사면 안정성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어쩌면 그럴 수 있었는지? 필자 자신이 현장에 가봐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잠시 관여 했었던 부산의 E 아파트 현장의 지하주차장 하나가 공사도중 지하수위가 증가하여 부력때문에 하늘로 솟아 올라 난리가 났었는데(즉 콘크리트로 제작한 배가 된 셈이다), 아쉽게도 필자는 졸병이라서 사고 수습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부력에 대한 대책공법으로 유공관을 이용한 배수공법이 채택되었는데, 아마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 같다. F 도로공사 관련 프로젝트에서는 발주처 담당자에게 연약점토상 실시된 성토로 인한 침하를 계산할 때 점토를 무조건 정규압밀 조건으로 가정해서 침하를 산정하면 과다평가 된다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OCR를 따져가며 과압밀과 정규압밀영역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잘 이해를 못해서 답답함을 느끼며 정말 유치하게도 지적 우월감을 맛보기도 했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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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유일하게 관여했던 해외 프로젝트였던 베트남 초연약지반에 시공되는 콘도의 건설 관련 말뚝기초에 대한 기술지원을 했는데, GL (-)15m 정도까지는 SPT-N 이 0타/30cm 일 정도로 초연약지반이었다. 현장을 방문하여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층 건물의 기초를 시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목재말뚝을 인력으로 항타하는 모습과 흙을 대나무 광주리로 머리에 이고 나르는 등 생소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출장시 당시 하노이 최고의 호텔이었던 대우호텔에서 숙박을 했는데 우연히 아르헨티나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과 단둘이만 엘리베이터를 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바로 그 콘도에 몇 년 전 방문하여 며칠 숙박하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1995년 겨울 무렵 회사에서 토익시험을 보았는데 필자가 근무하던 토질팀의 평균점수가 아마 400점 대 였는데(매우 우수한 점수) 이에 대한 타부서에서의 반응: 역시 엘리트 팀은 다르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또 다른 재미있는 기억으로는 민원인들이 본사로 항의집회를 하러 온다고 해서 부서별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을 구사대로 인력동원하여 본사 앞 거리에서 반나절 정도 대기했었다. 다행히 아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좀 긴장 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엔 토요일은 오전만 근무를 한다고 해서 반공일(半空日)이라고 불렸다(반공(反共) 활동과는 무관). 그런데 필자가 근무하던 기간 동안 반공일이 격주 토요일 휴무로 변경되고, 토요일엔 자율 복장으로 변했다. 그래서 당당히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더니 그게 윗분들 눈에는 거슬렸는지 잔소리 꽤나 들었다. 또한 보고서 & 결재서류 작성 및 구조계산 등의 업무에 있어서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의외로 수기로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그림 6). 


즉 지금 같으면 거의 전적으로 사무용 및 지반해석 전산프로그램에 의지했을 일을 상황에 따라서는 전자계산기를 이용하여 직접 계산해 가면서 구조계산을 했다(자연스럽게 모든 구조검토 과정을 본인이 완전히 숙지할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어쩌면 업무가 힘들긴 했더라도 당시 기술자들의 수준이 요즘 기술자들보다 더 우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90년대 초반 정도까지는 토질을 전문으로 다루는 부서가 많지 않아서 예를 들어 가시설을 설계함에 있어서 각종 경험토압을 이용해 작용토압을 산정하고 여기에 단순보 혹은 연속보 개념을(즉 앵커나 버팀보 설치위치를 지점으로 가정) 적용하여 구조부에서 해석을 진행했다고 선배들에게 들었다. 당시엔 기술사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았는데, 특히 전문기술사 자격증 소지자가 받던 자격증 수당이 25년이 지난 지금보다도 더 큰 액수였으니(연봉으로 환산하면 당시 필자 연봉의 대략 1/3 정도) 그때는 정말로 건설기술자들에겐 호시절 이었음에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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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흙막이 가시설 별거 아니라고 폄하하곤 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가시설의 설계 및 시공은 실제로는 지반공학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이러한 업무를 통해서 지반기술자로서 성취감과 보람도 느끼고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에게 가시설이나 말뚝 그리고 지반공학 분야의 각종 내용을 가르칠 때 당시의 경험들이 정말로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된다. 이는 책이나 논문에선 절대로 알 수 없는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비록 이제는 현업과는 멀어졌으나 그래도 학생들에게 현장의 느낌을 어느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건 25년 전의 경험 덕분이다. 


당시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아무 생각없이 해석하고, 도면 그리고, 보고서 쓰고, 현장 방문하고 그랬지만, 서정주 시인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라고 했던 것처럼 필자를 지반기술자로 성장시킨 것은 팔 할이 A건설에서의 경험이다. 하지만 입사하자마자 업무보다는 유학준비 하느라 영어공부와 당시로는 매우 느리고 자료도 적었던 인터넷 검색에 더 치중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찍 출근해서 업무가 시작되기 전에 영어공부, 점심 후에도 영어공부 하느라 업무는 뒷전이었던 셈이다(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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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내에선 거의 최초로 소일네일링 공법이 적용된 대심도 터파기 공사가 강남에서 진행 중이었는데, 담당업무가 아니라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단지 시키는 일만 적당히 처리했던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회사 근무 중 동료들을 집으로 2회 초대했다. 결혼 후 집들이는 당시엔 필수였으니 특이할 게 없겠지만, 두번째는 퇴사한다고 거의 20여 명의 동료들과 집에서 술잔치를 벌였으니 이건 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겁 없는 새신랑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회사를 다녔던 게 IMF 이전이라 건설경기가 매우 좋았던 시기라서 흥청망청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 강도도 다소 느슨한 편이었다. 그래서 오후엔 자주 사다리 타기 내기를 해서 간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이런 저런 회식이나 각종 단합 대회도 참 많았다. 그런데 필자가 회사를 떠난지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IMF가 닥쳤으니 남아 있던 동료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을 거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박사과정 진학 후 학위논문의 주제로 몇 달 연구를 진행했던 [지하터파기로 인해 융기(Heaving)가 발생하는 지반에 근입된 말뚝의 거동 연구]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그리 큰 이슈가 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고, 연구주제를 변경할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이다(다행히도 우여곡절 끝에 학위주제를 말뚝에 작용하는 부마찰로 변경하여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어느덧 회사를 떠난지 24년여가 지났지만 토질팀은 지금도 언제든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혹은 친정집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 고인이 되셨거나, 은퇴하셨거나, 아직도 회사를 굳건히 지키고 계시거나, 다른 곳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계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필자가 1996년 여름 사보에 기고했던 형편없는 기사를 어렵게 찾아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그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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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이철주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Asia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임계상태토질역학(critical state soil mechanics)과 관련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시공사에서 지반기술자로 근무 후 Cambridge 대학교에서 부마찰이 작용하는 말뚝의 거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홍콩과기대(HKUST)의 전임연구원과 Geotechnical Consulting Group(Hong Kong Branch)의 지반기술자를 거쳐, 삼성중공업 건설사업부에서 토목설계 및 시공을 담당하였다. 2006년부터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관심 분야는 Geomechanics 와 Soil Plastic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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