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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진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첨단궤도토목본부

   




시작하며

얼마 전 퇴근길에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출연자들이 각자 바로 떠오르는 가장 좋았던 과거 이벤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나도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러 순간들이 있겠지만, 요즘 여행이 어려운 시기여서 그런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했던 미국 여행이 문득 떠올랐다. 인생에서 여행에 대한 나의 생각도 바뀐 계기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조금 지난 기억을 더듬어 특별할 것 없는 얘기지만 여행 중에 흙, 돌이 기억에 남았던 나의 여행이야기를 조금 소개해볼까 한다.

 
2017년 10월 추석연휴는 4일 휴가만 내면 16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라는 것을 거의 1년 전부터 온갖 언론에서 떠들어주고 있었다. 그때 나를 자극했던 말 중에 하나가 “돈, 시간, 체력이 동시에 있는 시기는 우리 인생에 거의 없다.”였는데, 시간이 갑자기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번엔 나도 뭔가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추석 때 차례를 지내지 않고 놀러가기는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터라 조심스럽게 아버지께 “다시는 이런 부탁 안드릴게요.. 내년 추석은 한 번 건너뛰시죠....”말씀드린 후, 비행기 티켓부터 끊고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여행의 기억

일단 시간(15박 17일)과 장소(미국 서부)는 정해졌다. 관련해서 책도 사고 카페에도 가입해서 정보도 수집하고 다른 사람들 다닌 후기도 보고 식구들이 가보고 싶은 곳도 일단은 들어보고 호텔, 렌트 등 필요한 예약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거의 1년 가까이 남아 있는 시점부터 계획을 짜다보니 정말 가게 될까 싶기도 했다. 일단 거의 일정을 잡았는데, 갑자기 5월경에 우리 여행 동선에 있던 1번 국도가 호우에 따른 산사태로 잠정 폐쇄되었다. 이때만 해도 우리 여행은 10월이니 5개월이면 회복되겠지 했지만 2018년까지 잠정 폐쇄!! 멋진 자연 경관을 보며 드라이브하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 급히 일부 일정을 수정했다(우리나라였다면 빨리 복구됐을텐데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사진을 보니 규모가 크긴 컸다. 사실 모르고 갈 수도 있었는데 미리 알고 계획을 수정한 게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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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발! 나도 우리 가족도 여행을 떠나기에 문제없이 건강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조금 긴장이 되긴 했던 것 했다. 준비하고 예약한 것들이 문제 없을까? 등등.. 그리고 또 생각해보니 아내는 물론 아이들과 17일간 24시간 내내 같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었는데 과연 부부간, 부자간에 별 문제 없이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갖고 출발했다. 미국 여행의 시작과 끝은 샌프란시스코였다. 일단 금문교 산책, 야구장 관람, Pier 39, 유니온스퀘어 등 시내 관광을 하면서, 주유소, 식당, 주차장, 교통신호 등 현지에 적응해 보며 한국 수퍼에 들러 2주간 일용할 햇반, 김치 등 식량도 준비하고 먼길을 떠날 준비를 하며 무사히 첫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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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서부 여행이 시작됐다. 출발 전 여행 사전 조사 중에 아이들과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가장 큰 살아있는 나무들이 있다는 ‘세콰이어파크’였다(약 100미터 키의 나무에 2000년 이상의 나이의 나무도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에 아이들도 나도 신선했다. 지금 사진으로 보면 그 느낌이 잘 전해지지는 않는 듯 하다. 한나절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무뎌지긴 했지만 한 번쯤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 당시 박물관 같은 곳에서 세콰이어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을 어렵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찾아보았다. (※ 세콰이어는 직사광선이 필요한 나무이면서 껍질이 불에 강할 정도로 두꺼워서 성장 초기에 산불이 나면 다른 종들은 태우지만 세콰이어는 살아남을 수 있고,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게 되면 산불이 세콰이어 잎을 태우지 못할 정도로 키가 커져서 다른 종들이 산불에 타도 세콰이어는 잘 살아남게 된다고 한다. 또 하나, 세콰이어 씨앗은 산불에 그을려야 발아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산불에 잘 적응하도록 진화한 세콰이어만 이곳에서 자리잡고 잘 살게 된건지? 산불이 잘 나는 곳에서만 잘 적응해서 살도록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아무튼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 세콰이어 파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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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새벽 5시에 출발해서 브라이스 캐년으로 향했다. 약 10시간 정도 운전했던 것 같다. 처음 들어보는 중남미 분위기의 음악을 계속 들려주는 채널 하나에 고정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느끼면서 재미나게 드라이브를 즐긴 날로 기억된다. (TMI : 그런데 운전 중간에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카톡이 울린다. 내 일정을 대략 알고 있던 지인들이 라스베가스에서 총격사건이 크게 났던데 혹시 어디냐며? 그날 마침 라스베가스에 들러서 점심먹고 주유하고 나오던 참이었는데... 며칠 지내며 익숙해지며 편해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다시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더 둘러보게 되는 일이었다.)운전하면서 문득 보니 도착시간과 남은 시간 등이 맞지 않아서 생각해 보니 미국의 시간이 바뀌는 경계를 지나는 경로였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쳐보니 많이 헷갈렸다. 아무튼 열심히 달려서 도착한 브라이스캐년!!(※ 브라이스캐년은 수만개의 첨탑 모양의 바위 기둥들로 이루어진 국립공원이다. 바다밑에서 흙들이 쌓이고 돌이 되고 이후 지각변동에 의해 솟은 후 흐르는 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비교적 단단한 암석만 침식되지 않고 남아서 무수한 첨탑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본 기사 코너 제목과 잘 어울리는 곳인듯!!) 사진으로 대략 보고 기대하고 갔지만 직접 보니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기대 이상의 멋진 광경이었다. 일정을 짜면서 이곳을 반나절밖에 넣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며칠 머무르면서 트래킹도 하고 캠핑도 하면서 구석구석 가보고 싶은 곳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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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은 계속 캐년 일정이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노트북 바탕화면으로 많이 볼 수 있었던 엔탈롭캐년이다. 죽기 전에 봐야할 절경 중에 하나라는 이 캐년은 나바호족(Navajo)의 부족 공원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관광할 수 없고 나바호족 가이드와 동행하거나 투어프로그램을 이용해야만 엔탈롭 캐년을 관광할 수 있다고 해서 미리 예약했던 곳이다. 이 곳도 물이 흐르면서 침식된 돌들로 이루어진 협곡이라 그 안에 들어가면 오랜 세월의 시간을 볼 수 있었다. 정말 겹겹이 쌓인 흙과 그것이 솟아나고 깎이고 해서 만들어져 온 시간을 생각하니, 영화에서처럼 한 순간에 빠른 화면으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물의 흔적이 전혀 안보였지만 어쩌다 한번씩 홍수가 나서 협곡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해 사고로 죽기도 하는 곳이라는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엔탈롭 캐년은 마치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붓으로 색칠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지지 말라고 하는데 만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사실 사진이 실제보다 더 예쁘긴 했다. 가이드 해주는 나바호족도 사진이 잘 나오는 카메라 설정을 입구에서 알아서 다 세팅해주는 친절함도 잊지 않았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지만 ‘카메라 트릭’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 느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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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엔탈롭캐년 구경을 마치고 근처의 홀슈밴드로 향했다. 홀슈밴드는 말굽 모양으로 생긴 곳으로 이곳도 콜로라도 강이 오랜 세월에 걸쳐 깎여서 만들어진 절경이었다. 낭떠러지 너머 말발굽 모양의 계곡 아래로 아찔하면서도 멋진 모습을 담고 싶어서 최대한 근접해서 몸을 바닥에 붙여서 사진을 찍었는데 전망대는 콜로라도 강에서 높이 300m가 넘다고 했다. 펜스같은 안전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차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곳에서 심심치 않게 추락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멋지긴 한데 위험한 곳이라 주의가 필요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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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거대한 사암 덩어리들로 유명한 모뉴먼트밸리로 향했다. 사전 정보에 의하면 이곳은 노을과 일출이 멋진 곳이라고 해서 서둘러 이동했는데 다행히 해지는 순간부터 볼 수 있었다.  일몰이 가까워지면서 태양의 높이와 그림자 방향이 변하는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광경이 바뀌는데 과연 노을과 빛이 만들어주는 이미지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참고로 제가 찍은 카메라에는 잘 담기지 않았지만 인터넷에 찾아보시면 멋진 사진들을 보실 수 있음) 여행서의 소개에도 나오지만 이곳은 마치 다른 행성의 표면을 영화에서 상상으로 표현할 때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진에서도 보이는 우뚝 솟은 돌덩이들의 높이는 수백미터에 이른다고 하는데 사실은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깎여서 침식된 것이라고 하니 이곳도 얼마나 많은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한 이곳은 나바호족의 성지로 유럽에서 이곳으로 사람들이 건너오기 훨씬 이전부터 인디언들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뭔가 성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왠지 모르지만 슬픈 역사가 많았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큰 돌덩이 몇 개였지만 미국 여행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 중 하나로 기억된다. 이곳도 다음에 또 미국 여행을 오면 한 번 더 여유있게 와보고 싶은 곳이다(※ 참고로, 모뉴먼트 밸리 안에 호텔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미리 예약하고 가면 호텔 방에서 노을과 일출을 감상하기에 매우 좋은 포인트여서 1박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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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년 중 마지막은 그랜드캐년이었다. 처음 여행계획을 세울 때, 동선도 고려했지만 처음에 그랜드 캐년을 보면 다른 곳들이 시시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에 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수십억년동안 융기와 침강, 침식으로 만들어진 이 협곡은 1540년에 발견된 이래 1800년 대에서야 그 지도가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길이가 447km에 너비가 6-30km, 깊이는 1500m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가 330km 정도라고 하니까 그 크기가 어림 짐작은 가지만 사실 한 눈에 보이는 넓이는 제한적이어서 그런지 그 정도 실감은 나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래도 이 광경은 오랫동안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에 두어 시간동안은 한 자리에 앉아서 감상했던 것 같다. 우스운 일화 하나! 그랜드캐년 안에 있는 숙소 예약이 어렵다고 해서 나름 부지런히 그랜드캐년 안의 로지(Lodge)를 예약해서 아이들한테 생색 좀 내려 했는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아들이 하는 말 “우리 아빠가 도끼(※ 유명한 래퍼)였으면 이런 데서 안자고 좋은 호텔에서 잘텐데...”하는 말에 여행 중에 아이들한테 화내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것이 순간 무너지면서..(사실 여러번 무너지긴 했다). 일단 미국 여행 중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흙, 돌과 관련있는 여행은 여기까지이고, 이후 라스베가스, 샌디에이고, LA, 서부 소도시 등의 일정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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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별 내용 없는 기사지만 그래도 몇몇 회원분들은 읽으시는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잘 쓰고 싶었지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그동안 기사 써달라며 괴롭혔던 선후배 회원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과 속죄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실감했지만, 4년 전 여행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4년 전이지만 여행 사진에서 매 순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적어도 나한테는 참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또 아이들과 이렇게 여행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다고 한다. 지금은 나만 좋았던 여행인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아이들도 평생 기억할 좋은 추억이 될 거라는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마무리하면서, 참고로 몇 년 전에 출판된 최인철교수의 ‘굿 라이프’라는 책에 나온 그래프(행복 칼로리표)를 소개하면 다음 그림과 같이 우리 인생에 여러 가지 활동들을 재미와 의미의 높고 낮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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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컴퓨터나 TV를 보고 SNS나 문자하는 것들은 재미도 의미도 그다지 크지 않은 활동이라고 한다(불행히도 내가 매일 가장 많이 하는 것들인 듯....). 반면, 상대적으로 재미와 의미도 있는 1사분면의 활동들로는 데이트, 산책, 사교, 대화, 음주, 먹기, 쇼핑 등이 있는데, 이들을 한번에 할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가 바로 여행이라는 것이다, 결국 여행은 우리 인생에서 행복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좋은 활동이라는 얘기다. 또 저자는 우리가 좋은 TV, 자동차, 핸드백을 사서 평생 추억하며 즐거워할 수 없지만, 여행은 평생 추억하며 행복감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소비라고 말하는데, 상당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한편, 우리가 언제부턴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요즘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여러 생활이 제한되고 더더욱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면서 지루할 법도 한데 오히려 시간은 금방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어디서 보니 우리 뇌는 새로운 일들, 신선한 자극의 기억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반면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은 기억에 오래 남지 않기 때문에 어릴 때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지금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꼭 어디를 멀리 떠나야만 하는 거창한 여행은 아니라도, 어디서든 새로운 사람, 늘 보지 못하는 풍경, 먹어보지 못한 음식, 익숙하지 않은 문화 등을 경험해보고 일생동안 미루기만 했던 다양한 것들을 배워보면서 새로운 자극을 많이 받을 수 있다면, 같은 시간을 더 오래 늘려서 의미이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이런저런 핑계로 늘어져 있는 시간이 많지만, 앞으로는 조금 부지런해져 볼까 하는 소극적인 다짐을 해본다.


“올해도 내년에도 앞으로도 항상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고 새롭고 신선한 일들로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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