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


바리톤 양성원
연세대학교 OB 남성합창단(GLEE CLUB) 지휘
(ssgtyang@hanmail.net)

                      



말없이 ...

        

alt

S.라흐마니노프

그 어떤 말로도 달랠 수 없는 슬픔에 잔잔히 스며드는 그런 노래가 있다. 그 슬픔 깊은 곳에까지 닿아 포근하게 어루만져주는 그런 노래가 있다. 세상 모든 따듯한 말들을 한껏 품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노래는 아무 말이 없다. 단지 형언할 수 없는 위로로 다가올 뿐이다. 말이 필요하다면 ‘사랑의 슬픔’이라 붙은 부제 한 마디만으로 충분하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1873~1943)의 ‘보칼리제’(Vocalise; 가사 없이 모음만으로 부르는 성악곡)는 바로 그런 노래다.


라흐마니노프에게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자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었지만 그의 음악은 여전히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좀 더 말하자면, 세기가 바뀌면서 음악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당시의 거대한 변화와 혁신에 역행하여, 그는 그저 뻔하다고 치부될 수도 있는 지난 세기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선율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라면 시대에 역행하든, 발을 맞추든, 아니면 앞서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80여곡 이상의 많은 낭만적인 가곡을 썼는데, 자주 거론 되는 곡으로는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들을 가사로 한 ‘소프라노와 테너를 위한 독창곡 14곡’(op.34)이 꼽힌다. 그 중에서도 제14번 ‘보칼리제’가 역시 으뜸으로 여겨진다. 그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은 말이 없음으로 인해 한 차원 높은 영혼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바로 그 힘이 그 14곡들 가운데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이유일 것이다.


어디 우리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 뿐이겠는가? 귀에 들려오는 온갖 세상 소리에도, 눈에 보이는 온갖 세상 모습에도 또한 그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합창 교향곡’은 베토벤이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곡된 것이다. 소리를 잃어버린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쁨에 찬 ‘환의의 송가’를 작곡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롤랑은 “신이 인간에게 가장 잘못한 일이 있다면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은 것”이라고 했지만, 반대로 만약 베토벤이 귀가 멀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기에 들을 수 있었던 천상의 소리, 그 영혼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


굳이 장애가 오히려 삶의 가장 고귀한 선물이었다는 식의 진부하다 할 수도 있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를 이해해 볼 수 있는 한 연구결과가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한 연구팀은 베토벤의 작곡 스타일과 난청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를 ‘영국 의학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에 실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베토벤이 앓았던 난청이 그의 독특한 음악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9번 교향곡’이 그의 난청이 가져다준 선물임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한편, 이탈리아 팝페라 맹인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 그는 12살에 시력을 잃었음에도 이후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도 강렬했던 그의 열정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변호사를 그만 두고 째즈바에서 일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설적인 테너 프랑코 코렐리를 찾아가 배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팝과 오페라를 혼합한 ‘팝페라’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내가 시력을 완전히 잃었을 때 두려움과 절망의 눈물을 모두 쏟아 내는데 필요한 시간은 꼭 한 시간이었다. 나는 눈물을 비워낸 그 자리에 내 영혼을 담을 수 있었다.”


우리 젊은 날에는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잘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대로 쫓아다니며 자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는 가까이 있는 사물들이 흐려져 좀 멀리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보이는 대로 쫓다 헛걸음질하기보단,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그만큼 살아봤으면 이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단 마음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에 감동하라는 신의 바램이 아닐까?


alt

소프라노 안나 모포

우리 젊은 날에는 가까이서 나는 소리가 깨끗하게 잘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들리는 대로 쫓아다니며 자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는 그 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들리는 대로 쫓다 일희일비하기보단, 가려서 듣고 마음으로 그 모든 소리를 이해하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그만큼 살아봤으면 이젠 귀에 들려오는 세상 소리에 솔깃하기보단 영혼의 울림을 느껴보라는 신의 바램이 아닐까?


예전에 공자가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듣는 대로 순리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을 말했던 것 또한 이를 일컬은 게 아니었을까?


사실, 그 모든 영혼의 메시지들은 온 세상 곳곳에 널려있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만 마음을 두고 귀를 기울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세상 소리를 모두 걷어내고 나면 진짜 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나는 문득 집을 나와 개천을 따라 난 산책로를 30여분 걸었다. 한강이다! 갑작스런 추위에 그토록 북적이던 사람들 발걸음도 뚝 끊겼다. 마른 물풀들 사이로 문지르듯 슥슥 스치는 바람소리, 강가 바위틈 사이로 노닐 듯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세상 소리 모두 걷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진짜 소리가 들린다. 그 속에 섞여 함께 흘러온, 누군가 말없이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슬픔인 듯, 사랑인 듯,,..! 천년 세월의 흐름을 따라, 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지금 이곳까지 흘러온 듯...! 보칼리제!


[음악감상]

♬  보칼리제(Vocalise),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v), 소프라노 안나 모포(Anna Moffo)


             





                      

alt


이철주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cj32@kangwon.ac.kr)

                      



고전과 원전을 읽는 것에 대하여

        

Terzaghi 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압밀이론을 개발하고 발전시킨 것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Cambridge 대학교 토목공학 전공의 경우 학부수업에서 편미분방정식으로 나타나는 Terzaghi의 압밀공식이 아닌 Isochrone(그리스 말로 같은(iso)-시간(chrone)이란 의미)을 포물선으로 가정하여 점토의 압밀도 및 침하를 유도하는 것을 위주로 다룬다. 이에 대해서는 Schofield & Wroth(1967)의 불후의 명저 ‘Critical state soil mechanics’에 처음으로 설명되어 있다(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 이를 통하면 복잡한 편미분방정식을 풀지 않고서도 시간의 경과에 따른 과잉간극수압의 소산을 비교적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고안한 Schofield 교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얼마 전 대학원생들의 수업을 준비하면서 Terzaghi (1943) “ Theoretical soil mechanics” 를 읽다보니 자신의 압밀이론은 편미분방정식으로 되어 있어 복잡하고 어려우니, 아이소크론을 근사적으로 포물선으로 가정하여 분석하는 것도 괜찮고 정해(exact solution)와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문장이 있어서 매우 놀랐다. 이미 1920년대 이러한 아이디어로 독일어로 된 논문으로 발표했었던 모양이다. 이 순간 뭔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으며, 필자의 공부가 부족했음을 많이 반성했다. 그래서 다시 Schofield 교수님의 책을 자세히 보니 아닌게 아니라 아이소크론을 포물선으로 가정한 Terzaghi의 이전 연구(1925년 발간된 Erdbaumechanik)가 인용되어 있는 게 아닌가(Erdbau 는 earthworks 즉 토공으로 번역된다) !


다음의 그래프는 Terzaghi의 압밀방정식을 유한차분법을 이용하여 개략적으로 계산한 다양한 압밀도에 따른 아이소크론을 보여준다(양면배수 및 유효응력의 증가가 전체심도에서 일정한 조건, Z/H: 정규화된 점토의 심도, Δue/Δui: 정규화된 과잉간극수압). 이를 보면 확실히 아이소크론은 압밀도가 극히 낮은 압밀의 초기단계를 제외하고는 근사적으로 포물선으로 나타낼 수 있음이 명확해 보인다. 따라서 포물선을 이용한 공식에서는 아이소크론의 특성을 고려하여 점토 중앙부 부근에서 과잉간극수압이 전혀 소산되지 않는 압밀의 초기 단계와 점토 전체에서 압밀이 진행되는 단계를 별도로 구분하여 공식을 유도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J. Atkinson(2007) 의 “The mechanics of soils and foundations”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alt

         

참고로 당초 Terzaghi의 압밀이론에서 시간계수(T)와 압밀도(U)는 아래의 공식으로 나타나며 (U=52.6% 인 경우 두 공식은 약간 다른 T를 도출),

alt

한편 Taylor(1948)는 U<60% 인 경우는 Terzaghi와 동일한 공식을 제안하지만, U>60% 이상인 경우는 아래와 같이 Terzaghi와는 약간 다른 공식을 제시한다.

alt

이에 비해 포물선 공식의 경우는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U=33.3% 인 경우 두 공식 모두 T=1/12를 도출)

alt

각 방법에서 첫 번째 식을 살펴보면 단지 π와 3 만이 다르므로 두 공식에 의한 차이는 매우 작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압밀도가 각각 52.6%, 33.3% 이상인 경우에도 두 공식에 의한 결과는 그 차이를 무시할 정도로 매우 작다. 또한 Terzaghi의 공식은 정해가 아닌 일종의 근사해이지만, 포물선 공식은 정해라는 차이점이 있다.


보통 학부에서 배우는 시간계수와 압밀도 사이의 상관공식에 대해서 Terzaghi 는 52.6%를 기준으로, 그리고 Taylor(1948)는 60%를 기준으로 두 개의 공식을 제안한다. 그리고 어떤 교과서에서는 54%를 언급하기도 한다. 단 어느 경우에도 Terzaghi의 공식을 이용한다(U>60% 인 경우 Taylor의 공식은 Terzaghi의 공식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 차이를 알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어떤 연유로 그리된 것이지는 잘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압밀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지라 그동안 위에서 언급한 Terzaghi의 공식이 정해인지 알고 있었는데 Terzaghi 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니 사실 이는 푸리에 급수를 통해 얻은 편미분방정식의 해를 근사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아직도 어떤 과정을 통해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Taylor 는 자신의 저서에서 “ It has been found that equation 10.31(압밀방정식을 푸리에급수를 이용하여 구한 정해) may be represented with high precision by the following empirical expressions” 이란 문장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공식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 또한 어떻게 도출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 이 두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필자는 앞으로도 포물선 공식은 Schofield 교수님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방법이라고 학생들에게 얘기했을 것이고, Terzaghi의 압밀도 산정공식이 정해인 걸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몹시 부끄러워진다. 역시 우리는 원전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alt

         

이제 지반공학을 떠나서 고전을 얘기해 보자. 흔히 고전이라고 하면 보통 그리스 로마 신화 및 철학, 중국의 고대철학 또는 동서양의 각종 고전 소설을 의미하는 경우가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신화나 고전소설 정도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쉽게 읽기는 매우 어렵다. 필자도 나름대로 소크라테스나 공자, 맹자 등의 고전을 조금씩은 읽어보았으나 너무 난해하기도 하고, 책을 읽는 재미도 없고 해서 완독한 책을 손에 꼽을 정도이다. 특히 중국의 고대철학은 표현이 너무나 모호하여 이를 해석하는 저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으며,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유교의 근본틀인 개인의 자율보다는 권위에 절대복종하는 수직적인 가치관을 더 이상 현대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예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도발적인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소크라테스의 저서들은(본인이 쓴 것은 아니고 제자인 플라톤이 저술) 몇 번을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교양을 쌓는다는 측면에서는 그리스 철학, 중국의 고대철학 분야의 원전이 아닌 이를 알기 쉽게 정리한 개설서를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철학이 아닌 다른 고전은 재미있게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카이사르(시저)의 갈리아원정기,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중국의 고전소설, 그리스-로마 신화 등은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명작들이다. 또한 다양한 서양의 고전소설도 많이 읽어볼 것을 권한다. 비록 현대소설에 비해 가독성은 떨어지고 재미도 덜 하지만 고전소설은 오랫동안 천천히 그 맛을 즐길 수 있고 그 여운이 오래간다는 색다른 기쁨이 있다. 천연조미료를 사용해서 맛은 덜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자주 찾게 되는 건강음식이라고나 할까?

        

alt

         

최근 중년 남성독자층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그러나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다소 의심스러운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 달만에 겨우 완독했다. 작가의 이름은 그동안 국내에는 카잔차키스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리스학 전문가인 유재원 교수에 의하면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카잔자키스가 보다 적합하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이 소설은 모두 영역본이었으며 소설의 시대 배경 및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전문번역가들이 번역하였다. 저명한 고 이윤기 선생의 영역본이 바로 그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유재원 교수가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한 작품을 읽어보니 이윤기 선생의 번역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역본의 한계는 물론이고, 작가의 소설은 20세기 초반 그리스 크레타의 정치적 변동, 크레타 방언, 그리스 문화, 종교 등을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된 번역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리스의 지식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할 정도이다. 어찌 되었건 원전번역을 읽고 나서 이윤기 선생이 자신의 최고번역작품으로 꼽았다는 번역이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주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을 생략했거나 영문판에 없는 내용을 번역가가 임의로 추가하는 등 원전과는 너무나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다.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고백해야겠다. 이는 필자가 최고의 소설로 생각해서 몇 년마다 되풀이 해서 읽는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혹은 백년의 고독)”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영역본이 주를 이뤘는데 최근엔 스페인어 원전을 번역한 도서가 나와서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영역본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원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다시 지반공학으로 돌아와서 얘기를 해보자면 최소한 대학원생 그리고 30대 젊은 기술자는 가능한 영문으로 된 도서, 논문, 기준 및 보고서 등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좋은 번역서들도 많지만 그래도 역시 원전을 제대로 읽어봐야 그 내용이 온전히 자신의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일취월장하는 영어실력은 덤이다.

        

문화광장' 다른 기사 보기
prev
next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