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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톤 양성원
연세대학교 OB 남성합창단
(GLEE CLUB) 지휘
(ssgtyang@hanmail.net)

일곱 빛깔 한 데 모여 한 줄기 빛 되어


장사익의 ‘찔레꽃’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피아노로 시작되는 전주는 얼핏 한국 가곡인 것 같다가, 노래가 시작하자 가요인 듯하고, 곧 ‘도레미솔라’ 5음계의 민요 느낌도 나는데, 좀처럼 감이 오질 않아 무심코 지나친 때가 있었다. 국악도 아니고, 가요도 아니고, 그렇다고 크로스오버도 아닌 것이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골 장터에서나 들어봄직한 탁하고 거친 그 소리에는 부드럽고도 애잔한 무엇이 담겨있었다.


그는 가구점 점원, 전자회사 영업사원, 딸기 장수, 카센터 등 대략 열댓 개의 직업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낙원상가 노래학원에서 노래를 배우기도 하고, 국악기를 접하기도 하는 등 음악적 열정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모든 삶의 애환과 음악의 빛깔들을 한 데 담아 “가장 한국적인 소리”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잿빛바랜 머리와 흰색 전통의상이 그의 온화한 얼굴표정과 어울려 이제는 초연해보이기까지 한다.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작(, 1841~1904)은 여인숙집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이며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다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개인교습을 하고, 여인숙과 극장을 돌며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가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겨워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심지어는 작곡할 종이와 피아노까지도 여의치 않았다고 하니 오죽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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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히려 여인숙과 극장을 돌며 비올라를 연주한 덕에 그는 베토벤, 슈베르트의 고전주의 말기에서 리스트, 바그너의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변화에 따른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아버지의 여인숙 주변 환경, 시골 아마추어 악단, 오르간 학교 그리고 그 후 겪게 된 평범하고 가난한 음악가로서의 생활 등 그의 삶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바로 이 바탕 위에 드보르작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민속적 요소 즉 보헤미아 선율과 색채를 입히기 시작했다. 그가 익혔던 다양한 음악적 양식들과 그가 겪었던 다양한 삶의 경험들은 일곱 빛깔 무지개로 한 데 모였다. 마침내 그의 음악은 한 줄기 빛이 되어 발하기 시작했고 곧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민속(보헤미아)적인 음악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그 일곱 빛깔은 바로 우리들 젊은 날의 아름답고 화려한 순간순간의 삶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젊음의 새싹은 금방 세상을 온통 초록 빛깔로 물들인다. 보랏빛 환상 속 로맨스를 꿈꾸며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질주하다 자빠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때로는 파랑새를 쫓아 푸르른 바다로 달려갔다가 검푸른 남색 빛깔 깊은 바다 속을 보고 겁에 질려 떨며 주저앉기도 한다. 그렇게 젊음은 점점 노랗게 무르익어간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이제 그 일곱 빛깔은 한 데 어울림으로 제각각의 색을 점점 잃어간다. 그리고 눈부시도록 밝은 한 줄기 빛으로만 남아 세상을 비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며 노래와 감탄이 절로 나올 법한 바로 그 순간이다. 아니, 아름다움만으로도 부족하다. 이제는 신비롭기만 하다.


노인의 하얀 머리 또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온 세상 사람들의 머리 색깔은 제각각의 색을 띄고 있다. 빨갛고 노랗고 검다. 그 빛깔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멋을 뽐내며 화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흰색으로 변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다. 온갖 희로애락 속에서 각자의 빛깔대로 그만큼 살아봤으면, 이제는 모두가 똑같이 하얗게,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예전의 그 빛깔이 바래져감을 못내 아쉬워하고 슬퍼하곤 한다. 그런 우리네 모습을 보며 신은 더욱 가슴아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드보르작의 음악은 말년에 이르러서는 원숙미로 한층 더 밝은 빛을 발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온통 신비로운 기운으로 감싸여 있다. 그가 작곡한 9개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자주 공연되는 <루살카>(1900)가 바로 그것이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와 거의 흡사한 <루살카>는 인간세계의 왕자를 사랑하게 된 물의 요정 ‘루살카’의 감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특히 1막에서 사냥 나온 왕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마음을 왕자에게 전해달라고 달님에게 애원하는 루살카의 아리아 ‘달에 부치는 노래’(Song to the moon)는 단연 백미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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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연주로 시작하여 목관악기 오보에 이중주, 클라리넷 이중주로 이어지는 전주부는 듣는 이로 하여금 달빛 밝은 밤 깊은 산속 연못과 그 요정을 떠올리며 그 고요한 신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물의 요정 ‘루살카’의 노래가 흐른다. 소박하고 단조로운 민속선율은 어느새 풍부함과 장엄함으로 다가온다.


아름답다는 표현도 이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한 줄기 빛 속에서 내려온 흰 옷 입은 천사의 애잔한 노래라는 느낌 외에는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음악감상]

♬  달에게 부치는 노래(Song to the moon), 드보르작,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Renée Fle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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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주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cj32@kangwon.ac.kr)

책에 대한 잡문(雜文)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책을 읽는 사람이 열에 하나도 없는 기막힌 현실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설사 책을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영어공부나 각종 학습서를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 주범은 당연히(?) 핸드폰 ! 어떤 경우에는 지하철 한 구역의 좌석에 앉은 전원이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경우도 보았다. 걸어가면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심지어는 걸어가면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도 보았다. 이런 상황이니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지 않으면 매우 불편함을 느끼는 필자가 일종의 변태로 오해를 받을 지경이다.


과거엔 문학소년, 문학소녀, 문학청년 하면서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며, 하다못해 장식용으로라도 한국문학전집이나 세계문학전집 등을 구비해 놓은 집도 많았었다. 여담이지만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집에 적절한 규모의 도서를 보유하고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 비해 학업성취도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책 말고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꺼리가 너무나 많아져서 이젠 책이 철저히 외면당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책을 읽더라도 전자책을 읽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으니 종이책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필자도 예전에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전자책으로 읽어 보았는데 책장을 넘기는 손맛이 없다 보니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앞으로도 전자책을 즐겨 읽을 것 같지는 않다. 하다못해 학술논문이나 전공도서도 pdf 파일로는 대강만 읽고 꼭 필요한 부분은 출력해서 본다. 최근 필자를 포함하여 음악을 LP로 듣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전자책의 확대와 관계없이 종이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난 추석에는 흔히 비행기 탈 때 읽는 책이라고 불리는 통속소설을 많이 읽었다. 평소 소설은 그다지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국내 대표적인 인기 통속소설 작가로는 김성종, 이원호와 김진명이 있다. 김성종은 1970~1990년대를 주름잡은 인기 추리소설 작가인데 1990년대 최고의 인기드라마 가운데 하나인 대하소설 [여명의 눈물]을 집필하기도 했다. 요사이 국내에서 일본작가의 추리소설은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데 비해 국내작가의 작품은 외면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에는 국내작가의 추리소설이 큰 인기를 누렸는데 어찌하여 바닥으로 추락을 한 것 일까 ? 이원호는 공대출신으로 중동에서 섬유수출사업을 해 크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걸프전으로 부도가 나서 망했는데, 채무에 쫓겨 도피하는 와중에 자전적 소설을 써서 그 인세로 빚을 탕감한 기적의 사나이다.


작가 스스로 [내 소설은 쓰레기다]라고 했다지만 자신의 해외무역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일화를 모티브로 삼아 전업작가로 출발을 했고 이후로는 한민족의 시베리아 이주 및 개발, 조폭, 정치소설, 역사소설 심지어는 SF 소설까지도 집필을 했다. 아마 판매량으로는 그 누구도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등장인물의 특징이나 이야기 전개가 어찌 보면 뻔하지만 이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작가의 필력이 만만치 않다. 문학성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밀리언셀러 작가의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다. 빠른 이야기 전개, 웅대한 스케일 그리고 예측하기 힘든 반전 등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쉽게 말하자면 중장년 남성을 위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강안남자(强顔男子), 철면피라는 의미]라는 작가의 소설은 거의 포르노 수준으로 성적인 묘사가 너무 심해서 대강 읽고 버렸다. 작가의 작품을 지하철에서 읽기는 좀 부끄러울 것 같다. 이에 비해 인기작가 김진명의 작품은 극단적인 주제(정치 혹은 역사)를 다루며 그 구성이 대체로 비슷하며 몇 페이지만 읽고 나면 이후의 이야기 전개를 그려볼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인데 이를 마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션인 것처럼 포장하는 마케팅 전략도 크게 불만이다.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고구려 역사 시리즈는 아무리 소설이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사왜곡이 매우 심하다. 또한 반일 혹은 반중을 테마로 하여 독자의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것도 불만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작가의 소설은 수차례의 시행착오 후 다 버리고 다시는 구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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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전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 자주 읽었던 책이 홍콩의 작가 김용의 무협소설이다. 출퇴근 하는 지하철에서 많이 읽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할 때는 오역투성이 파일을 인터넷으로 구해서 노트북으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나치게 중화중심 사고를 기반으로 소설이 씌어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성경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해외에선 김학(金學)이란 학문분야가 있을 정도로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중국의 작가 니쾅(倪匡)은 “고금중외 공전절후(古今中外 空前絶後,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비교할 소설이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없다)”라는 8자 평을 내리기도 했다. 김용의 소설은 단순한 무협소설이 아니라 문학성이 매우 높으며 그 구성이 탄탄한데 작가의 동양문화에 대한 엄청난 내공을 느낄 수 있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장르는 크게 다르지만 김용을 동양의 톨킨(Tolkien) 혹은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라고 부른다면 너무 앞서간 것일까? 그의 작품이 워낙 큰 인기를 누리다 보니 국내에서 실제저자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위작이 발간되기도 했다. 그런데 작가가 2005년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 목표로 했던 중국사 관련 도서를 집필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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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인의 절반이 1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평소 학생들에게 무슨 책이라도 좋으니 제발 책 좀 읽으라고 수없이 잔소리를 해 오고 있는데 전공공부, 영어공부, 자격증 공부 등에 대한 부담감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쉬운 영어책이라도 꾸준히 읽으면 저절로 영어실력이 쌓이게 되는데 영어교재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많아도 영어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통속소설 혹은 무협소설이라도 읽으면서 책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좋겠지만 그런 책도 읽는 경우를 못봤다. 책 읽는 습관은 어릴 때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하는데 학원 다니느라 바쁜 요즘 청소년들이 책 읽을 시간을 내기는 어려울 것 이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책 읽으라고 하면서도 정작 부모가 책을 가까이 하는 경우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러다가 한국사회의 문화력이 점점 감퇴될까 걱정이다. 그런데 요사이 인기작사 및 강사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예능인문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인문학 장르가 있다(물론 아직 학술적으로 확립된 개념은 아니다). 이에 대해 학문의 깊이가 없고, 오류투성이에 인문학을 희화화 한다는 다양한 비판도 많지만, 그래도 이를 통해 책을 읽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무턱대고 비판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부지런히 읽어도 몇 주 정도는 필요할 정도로 방대하며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어서 철학에 대한 충분한 사전지식 없이 완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예능인문학을 통해 방송, 유튜브나 쉬운 책으로 철학에 대한 기초체력을 기른 후 도전한다면 완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예능인문학을 통해서 다양한 인문학 분야를 주마간산 격이라도 알게 된다면 나쁠 건 없다고 본다.  


(사족) 최근 삼성입사시험에 토사구팽(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 유방이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자신의 장군인 한신을 처형시킨 일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음. 실제로는 와신상담/오월동주/굴묘편시 등의 고사로 유명한 오월쟁패 기간 중 유래되었다고 함)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수험생들이 많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는 예전에 이제는 고인이 된 김종필씨에 의해 크게 유행된 바 있는데 [열국지]나 [초한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종필씨는 생전 마지막 출간된 책 [남아있는 그대들에게]에서 젊은사람들에게 동양고전을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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