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난 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주로 캠핑카를 타고 여행했다. 낯선 도시에서도 익숙한 우리의 공간이 있다는 건, 어린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서도 마음 놓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퀴가 구를 때마다 아이는 자라났고, 우리의 여행도 함께 깊어졌다.


그러던 작년 여름, 노르웨이 트롤퉁가에서 왕복 20km를 묵묵히 걸어낸 아이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제, 작은 배낭 하나쯤은 메어줄 수 있겠다.’ 생각하던 즈음, SNS에 떠돌던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에메랄드빛 호수와 초원, 그리고 설산이 겹겹이 이어진 풍경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낯선 지명이 적혀 있었다 -‘키르기스스탄’. 그 낯섦이 우리를 불렀고, 이번엔 캠핑카 대신 두 발로 걷는 여행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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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틴아라샨으로 가는 길


알틴 아라샨(Altyn Arashan)은 키르기스스탄 동부의 도시 카라콜 근처에 자리한 고산 계곡으로, 해발 2,500m 부근에 천연 온천과 초원이 펼쳐진 곳이다. ‘알틴’은 ‘황금’, ‘아라샨’은 ‘온천’을 뜻하는 키르기스어로, 이름 그대로 ‘황금 온천의 계곡’이라 불린다. 하얀 눈이 덮인 천산(Tian Shan, ‘하늘의 산’이라는 뜻) 산맥 아래로 온천 김이 피어오르고, 초여름이면 야생화가 만발한다. 유럽의 알프스처럼 웅장하지만 훨씬 더 거칠고 생경한 풍경 속에서, 알틴아라샨은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트레킹 코스로 꼽힌다.


알틴아라샨 트레킹은 흔히 “Long but Easy”라 불린다. 경사는 완만하지만, 편도 15km라는 거리는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작년 노르웨이에서 왕복 20km의 트롤퉁가를 완주한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힘들겠지만 결국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보통은 네댓 시간이면 닿는 길이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여덟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트레킹 초반 풍경은 의외로 단조로웠다. 숲이 우거진 길을 상상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긴 흙길이었다. 발 아래에서 흙먼지가 풀썩거리고, 길은 지루하리만치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확 열리며 초원 같은 길이 나타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밭 사이로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지루함을 조금 덜어주었고, 우리도 그 사이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발걸음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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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속에서 맞춘 발걸음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트레킹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아이는 씩씩했지만, 엄마아빠는 금세 숨이 찼다. 그래서 우리의 여정은 걷고 쉬고, 또 쉬고의 반복이었다. 엄마가 힘들면 쉬고, 아빠가 힘들면 쉬고, 아이가 힘들면 또 쉬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그 느림 속에서 서로의 발걸음을 살피며 멈추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대부분의 길은 완만했지만 마지막 구간, 마치 게임의 끝판왕처럼 기다리고 있던 오르막은 정말이지 잔인했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마주한 가파른 언덕에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올려다본 언덕 끝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을 넘어섰을 때, 발 아래로 펼쳐진 알틴아라샨의 자태는 생각보다, 기대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오래 잠가두었던 보물상자가 열리듯,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여유를 즐길 틈도 잠시, 갑자기 천둥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잿빛으로 물들었고, 빗방울이 굵어질 무렵 마침내 우리가 예약한 숙소, 에코 유르트(Eco Yurt)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와, 끝났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온몸은 흙과 땀, 그리고 빗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 밤 우리는 가장 따뜻한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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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서 도착할 수 있었던 길


돌아보면, 그 길은 우리 가족에게는  ‘Long but Easy’가 아닌 ‘Long and Hard’였다. 하지만 동시에 ‘Long and Together’이기도 했다. 끝없는 계곡길을 걸으며 우리는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법을 배웠고, 결국 함께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의 웃음, 엄마의 지친 숨, 아빠의 땀방울. 그 모든 순간이 겹겹이 쌓여 알틴아라샨의 풍경만큼이나 반짝거렸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확신했다.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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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과 정민아 부부는  

결혼 자금으로 414일간 세계 여행을 다녀온후 『우리 다시 어딘가에서』, 『함께, 다시, 유럽』 을 출간했다. 이후 남편은 여행 작가와 사진 작가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아내는 여행 기자와 웹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딸과 함께 떠나는 가족 세계 여행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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