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쇼핑중독자, Bookaholic

이철주

책을 무척 좋아하는 지금은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으로 지명이 바뀐 평화로운 산골마을에 살던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읽을 만한 책은 매우 드물어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고, 홀로 자취하시다가 주말이면 대도시(?)인 원주 본가를 방문하시는 담임선생님을 통해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당시 유행하던 어린이 잡지를 구해 읽으면서 책님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그 잡지 속 광고에 있던 [학습도감]이 너무 갖고 싶어서 그걸 사달라고 부모님께 조르면서 잠시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했었는데, 지금도 가슴속 깊은 곳에는 작은 한으로 남아있다. 요사이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으나 전집을 구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금성출판사의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마을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친구에게 어렵게 빌려서 몇 권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몇 해 전 각고의 노력 끝에 집사람 몰래 간신히 전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많이 읽지는 못했으나 가끔 집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그 마음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필자는 공자(孔子)님이 주역(周易)이 기록된 죽편(竹片, 즉 춘추전국시대의 책 册)을 하도 많이 읽어서 그것을 엮어 놓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인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표현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어떤 책을 읽는지를 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책이 곧 사람이다 !

2013-2014년 동안 영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했지만, 또 다른 기쁨은 150 권 정도의 다양한 도서(특히 중고도서)를 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연구년을 보냈던 케임브리지에 있는 무수한 서점 및 charity shop을 수없이 다녔다. 또한 주말마다 열리는 영국판 벼룩시장인 car boot sale을 거의 매주 다니면서 다양한 책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행복한 과정을 통해 참 많은 책을 구매했는데 필자의 영문 소장도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865년 무렵 출판된 [Perseverance under difficulties, 영국의 탐험가, 과학자 등을 다룬 책] 이며, 국문서적은 1954년 경 출판된 [태양없는 대지]이다. 그런데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영어로 씌여진 글은 별다른 차이가 없고 당시의 인쇄기술이 충분하여 읽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지만, 고작(?) 70년 전인 1950년대 출판된 국문도서는 세로로 씌여져 있고(그렇다고 세로읽기가 그렇게 불편한 건 아니지만) 인쇄수준이 매우 낮은 것은 물론이고, 온통 한문체라서 읽기가 매우 어렵다. 참고로 국문도서는 대체로 1980년대 초중반으로 기점으로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었다. 한편 집에 100-15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낡은 필사본과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소설책이 몇 권 있는데 이는 독서가 아니라 거의 암호 해독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을 보면 한국은 지난 100 년 사이 엄청난 격변을 겪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으나 대중화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기에 1860년대 영국에서 지금의 책과 거의 유사한 품질의 책을 인쇄하고 있을 때, 우리조상들은 (인쇄본도 물론 있었지만) 필사본을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영국사람들은 책을 대단히 많이 읽는데 런던에서 지하철을 타보면 많은 사람들이 문고판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집 1층 거실에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장을 볼 수 있으며, 특히 과거 왕족이나 귀족이 살던 저택의 엄청나게 넓은 서재를 방문해 보면 수천, 수만 권의 장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필자가 너무도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영광스러웠던 대영제국의 추억을 뒤로 하고 쓸쓸히 저물고 있는 영국이지만 문화산업만큼은 여전히 그 위력이 막강한데 여기에는 바로 독서의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족이지만 필자는 홍콩의 book sale 에서 구매한 북한에서 출판된 국문 및 영문도서도 몇 권 가지고 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신격화가 정말 대단해서 사이비 종교 서적을 읽는 느낌이 드는 정말이지 한심한 책들이다.

사실 필자는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 특히 학생들과의 술자리를 즐기지만 이것을 건전한 취미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가끔 인도영화(볼리우드(bollywood) 영화, 참고로 발리우드는 잘못된 발음이다)를 감상하는 것이 그나마 취미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유일한 취미는 책을 구입하고 읽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도서구입중독증 혹은 장서광 (bookaholic) 단계에 도달한 것 같은데, 덕분에 쇼핑중독자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같은 중독이라도 쇼핑중독증에 비해서 bookaholic은 훨씬 저렴하고 건전한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책읽기는 다른 취미활동에 비해 경제적인 부담이 매우 적다는 장점이 있다. 한두 끼 정도의 식사비용으로 수 일 동안 다양한 지식과 저자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물론 덤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집은 물론이고 연구실이 책으로 넘쳐나서 구조해석을 한번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전에 집안 정리를 잘 하는 비법에 대한 책을 읽고서 마음을 독하게 다잡고 수백 권 정도의 책을 버리거나 중고로 팔았고, 지금도 틈만 나면 어떤 놈을 처분할까 고민을 하지만 책님을 버리는 고통을 잘 알기에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중학교 시절 역사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찌되었건 세계사 과목의 성적이 가장 좋았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읽어온 책의 절반 이상은 역사관련 도서인 것 같다. 필자의 주요 관심분야는 대체로 역사(고고학, 로마사, 동로마사, 중국고대사), 북한, 중국, 태국, 인도, 티베트, 영국, 호주, 영국고대사/중세사, 냉전, 전쟁사 그리고 소행성 충돌(deep impact) 등이다. 최근에는 SF 소설에도 관심이 생겨서 주요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이글을 쓰면서 독자분들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판된 동주 열국지 (풍몽룡) (개인적으로는 초한지, 삼국지보다 열국지를 더 높게 평가한다), 사기열전 (사마천), 비잔티움 연대기 1-3 (노리치, 혹은 축약본인 종횡무진 동로마사), 갈리아원정기 (카이사르), 총균쇠 (다이아몬드), 성채 (크로닌), 백년동안의 고독 (마르케스), 오만과 편견 (오스틴), 리콴유 자서전 &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리콴유) 그리고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출간된 다양한 단행본 (중고서점에서 구매 가능)을 추천한다. 소위 말하는 벽돌 두께의 책(brick thick books, 1,236쪽)이라서 몇년째 마치지 못하고 있는 현대 SF의 고전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으면서 어찌 보면 황당하지만 저자의 기발한 아이디어, 자유로운 사고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창의력은 바로 이런 바탕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쁘게 살더라도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하다못해 무협지라도 읽어 보자. 홍콩의 소설가 김용의 무협소설은 일부 비판도 없진 않지만 김학(金學)이라는 학문분야가 생겼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책과 별로 친하지 않은 분들이 지금이라도 좀 친해지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다양한 책을 꾸준히 읽다보면 언젠가는 본인도 모르게 책 읽는 즐거움을 깨닫게 될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독자분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책님들을 많이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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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없는 대지 (1954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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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대전(1925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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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everance under difficulties (1865년 무렵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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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주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cj32@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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