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Oblivion)을 벗고

바리톤 양성원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피부색 검은 혼혈, 그런데 영어엔 “울렁증”! 좋아하는 것은 순댓국에, 고향은 이태원! 그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떠올렸다. “부모님이 힘들 때마다 너는 특별하다고, 언젠가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얘기해 주셨다. 그 말이 되게 힘이 됐다.” 그 ‘특별함’으로 그는 미국 TIME지 선정 ‘2017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30인’(The 30 Most Influential Teens of 2017)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한국 최초 흑인 남성모델 한현민(16)에 관한 이야기다.

열정과 애절함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아르헨티나의 탱고(Tango) 또한 처음엔 그다지 예술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 하층민들의 삶에서 사교춤으로 시작되었다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이후로 점점 발전되어 20세기 초에 유럽 사교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탱고가 그 ‘특별함’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 Piazzolla; 1921~1992)를 만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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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go

피아졸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수준급 반도네온 실력을 쌓았다. 한편 뉴욕 이주시절(1925~37; 4~16세)에는 클래식과 재즈에 더 심취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탱고를 재즈나 클래식과 같은 예술 경지로 올리고 싶은 열망을 키워 노력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누에보 탱고’(Nuevo Tango, 새로운 탱고)를 탄생시켰다. 미국적인 서민음악 재즈를 클래식에 잘 버무려 예술의 경지에 올린 조지 거쉰(George Gershwin, 1898~1937)을 연상케도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로움’은 ‘특별함’ 혹은 ‘낯설음’과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장벽을 만나게 마련이다. 피아졸라의 탱고 역시 이를 비껴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전통적인 탱고를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를 떠나 유럽,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그가 탱고를 세계적으로 전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발보다는 귀를 위한” 탱고, 감상음악, 순수음악의 한 장르로 발전, 승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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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Piazzolla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여왕 김연아의 연기로 한층 친숙해진 '안녕 노니노'(Adiós Nonino; Farewell Father), 2016 리우올림픽에서 체조요정 손연재가 선택했던 ‘리베르탱고’(Libertango) 등으로 대표되는 피아졸라의 여러 명곡들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로 내게 다가오는 곡이 있다. 피아졸라가 마르코 벨로치오 감독의 영화 <엔리코 4세>(1984)를 위해 쓴 ‘망각’(Oblivion)이다.

영화 속 엔리코 4세는 역사 속의 ‘엔리코 4세’(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대결에서 ‘카놋사의 굴욕‘으로 무릎 꿇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4세의 이탈리아식 이름)로 분장해서 축제를 즐기다, 낙마하여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누나는 동생이 사고 당시에 분장했던 11세기의 ‘엔리코 4세’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한다.

12년 후, 그는 기억을 되찾는다. 하지만, 타인에 의해 형성된 ‘망각’ 속에서 보낸 12년 동안의 삶이 곧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에 더해, 이제 그는 스스로 그것이 실체인 양 8년을 더 그 속에 머문다.

엔리코 4세가 보낸 ‘망각’의 20년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마치,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세상 속에서 지내던 어느 순간 문득 ‘나’를 돌아보지만, 결국 그 모습을 애써 현실로 받아들이곤 하는 우리네 민낯을 보는 것 같아서다. 이와 함께 영화 속을 흐르는 피아졸라의 ‘망각’을 듣고 있으면 그 내용과의 어울림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내 깊은 회한이 밀려든다.

힘겨우면서도 강렬한 반도네온의 선율, 이를 바이올린이 이어받아 애절함을 더하고, 희미한 반주가 완전히 동떨어진 듯이 주변을 맴돌다, 이내 모두가 격렬하게 한데 어울리는 것도 잠시, 쓸쓸함이 다시 찾아온다. 달리는 차창 밖에 스쳐 지나는 풍경처럼 대략의 형체만 겨우 드러나는 배경을 뒤에 두고, 외로이 춤추는 한 댄서가 선명하고 강렬하게 묘사된 한 장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 속에 묻힌 ‘나’! ‘망각’ 속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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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네온

올해(2018) 상반기 9급 공무원 지방직 경쟁률이 전체 지역평균 125:1이었고, 지역별로는 충청지역이 200:1에 달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최근 국회가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면서, 2만 5천명의 공무원이 새로 채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해당 학원가들은 유례없이 많은 공시생들이 몰리게 될 것이라며 벌써부터 술렁인다. 그 많은 이들이 그 ‘특별함’을 누르고, 같은 옷을 입으려 한다는 생각에, 한편 이해는 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얼마 전에, 우연히 한 매체에서 아주 ‘특별’한 음악으로 해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 밴드를 만났다. 전통적인 우리 가락 경기 민요가 현대적 감성이 담긴 레게, 펑크, 글렘락 등을 만나 어우러져 있었다. 아주 낯선 듯 친근하고, 생소한 듯 익숙하고, 참신한 듯 무르익은 음악이었다. 미국 공영라디오(NPR)의 인기코너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 한국 뮤지션 최초로 출연한 ‘씽씽밴드’가 그들이다. 특히 그들의 ‘특별함’을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는 점은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 밴드의 프런트맨 이희문의 인터뷰가 참 인상 깊게 남는다. "만들어진 밥그릇 안에서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안에서 싸움이 싫었다." “'맨땅에서 헤딩'을 시작한 거다. 의지할 데가 없으니 스스로 판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됐다.”

겨울 한가운데서, 나는 지금 산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산이 추운 겨울을 나는 방법은 모두 벗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벗을 줄을 모르고 계속 덧입기만 한다. 그러니 몸도 둔해지고, 발걸음 또한 무거워질 수밖에!

이제는, 겨울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기 위해 모든 것을 과감히 벗어던져 버리는 그 용기와 지혜의 시를 쓰고 싶다. 그리고 때가 되면, 보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바로 그 산을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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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 Oblivion (아스토르 피아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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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톤 양성원
연세대학교 OB 남성합창단(GLEE CLUB) 지휘

(ssgt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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